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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크 Sep 26. 2022

해골 모형이 걸려있는 4층 옥탑방

네팔 카트만두 YOU AND I 마사지샵

인도 뉴델리에서 1년 넘게 살고 있을 때였다. 인도는 축제의 나라이다. 그중에도 10월에 열리는 디왈리는 인도에서도 꽤 큰 축제이다. 디왈리는 겨울의 파종기를 맞이하는 의식이자, 힌두교의 달력인 힌두력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이다. 부와 풍요의 여신인 락슈미를 기리는 축제이기도 한데, 이름 그 자체가 ‘ 빛의 축제’ 혹은 ‘등불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디왈리 축제 동안 인도에서 사람들은 거리와 옥상에 모여 온갖 종류의 폭죽을 터뜨리며 불꽃놀이를 즐긴다.


문제는 그 폭죽이었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이자,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될지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밤새 터지는 폭죽 소리는 그래,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폭죽으로 인한 대기오염은 상상을 초월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폭죽을 터뜨리는지, 그날 밤은 물론이고 며칠 동안은 안개가 자욱한 듯 도시의 공기가 화약 냄새로 가득해진다.


가뜩이나 인도의 대도시들은 대기오염이라고 하면 전 세계에서 늘 1, 2위를 다툰다. 대기 오염이 심해지는 겨울과 봄에는 대기오염 농도는 PM2.5 가 500 혹은 600을 찍을 때도 허다했다. 그리고 하루는 대기오염수치를 보이 주는 앱이 보라색이고, PM2.5가 999라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999가 측정할 수 있는 오염도의 최대치였다. 그런 날이면, 공기에서 음식물 쓰레기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덕분에 인도 생활 내내 기관지염을 달고 살았고, 감기도 한 달에 한 번씩 걸리곤 했던 극한의 서바이벌 퀘스트가 가득했던 인도 생활. 뭔가 휴식이 필요했다.


당시 네팔에는 대학교 선배가 살고 있었다. 대학 선배이자 학회 선배였던 S언니는 스무 살 때부터 함께 여행을 다니던 오랜 친구와 결혼을 하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자리를 잡았다. 언니는 형부와 함께 카트만두에서 에어비앤비와 함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다니던 회사에서도 디왈리 축제기간 5일 중 이틀이 자체 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디왈리의 휴일과 그 주말을 이용해서 인도를 떠나기로 했다. 디왈리의 공해도 피할 겸, S언니도 보러 갈 겸 델리에서 1시간 반만 비행기를 타면 되는 네팔 카트만두로 놀러 가기로 했다.


네팔에 처음 가봤던 것은 그보다 몇 년 전인 2012년이었다. 6개월의 배낭여행 중 네팔은 인도 다음으로 방문했던 나라이다. 인도에서의 번잡함에 기가 질린 채로 방문한 네팔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역시, 첫 느낌이 중요하달까. 그 후로는 다니던 회사에서 장기 출장으로 네팔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S언니는 카트만두에 있는 동안 꼭 방문해보라며 한 마사지 샵을 추천해 줬다. 'You and I massage'. 카트만두 더르바르 막이라고 카트만두의 한 복판에 위치한 킹스웨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구글맵에 나와있는 장소에 내렸다. 분명, 구글맵에 의하면 이 건물이 맞는데 1층, 2층, 3층 다 올라가 봐도 도저히 마사지샵으로 보일만한 장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 마사지 샵이 있다고?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올라가던 계단의 끝. 건물에 있는 주변 상점에 물어물어 4층으로 올라가니 문 하나가 보였다. 간판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던 곳. 조그마한 간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지만 입간판이 보였다. 'You and I Massage'. 드디어 마사지 샵에 도착했다.  


추천받았던 마사지 샵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가게 되었을 때 조금 과장을 보태면 마치 불법 의료시술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추천을 받지 않았다면 절대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은 곳. 20년은 된 것 같이 오래되고 군데군데 색이 바랬던 베이지색 벽. 그리고 그 벽에는 한의학에서 쓰일 것만 같은 몸의 혈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와 함께 해골 전신 모형이 걸려있었다. 내가 상상하던 스파, 마사지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었다.


마사지샵은 조그마한 공간을 두 개의 방으로 나눠놓아 놨다. 한 방은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고, 거기에는 부황과 각종 침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다른 방에는 딱 세 개의 마사지 침대만이 놓여있었다. 나란히 누워있는 세 개의 초록색 마사지 침대는 마치 수술실을 연상시켰다. 마사지 침대 위에는 분명 처음에는 흰색이었겠지만 색이 바래서 누레진 흰색 침대보가 깔려있었다. 약간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생각났다. 언니가 마사지를 받으려 엎드려 누울 때 베개가 더러울 수 있으니 수건을 가지고 가라고 했던 말. 아.. 이미 늦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떡해. 그것 때문에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으니, 마사지샵에서 주는 반팔 반바지를 갈아입은 뒤 조심스럽게 머리를 베갯속에 묻고 엎드려 누웠다.


흰색 가운을 입은 마사지사 아저씨는 사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관록 있는 손길로 누워있는 나의 양다리의 길이를 재보더니 나의 등을 이리저리 맞추면서 마사지를 시작하셨다. 나의 몸 곳곳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투두둑 뼈 맞추는 소리가 잘 나는지, 그럼 지금 내 몸 이 구석구석의 균형이 다 맞지 않았던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마사지를 해주시는 아저씨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는 네팔 말을 할 줄 몰랐다. 이러다 잘못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 팔과 다리, 그리고 어깨에서는 투두둑 소리가 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사지를 받다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정말 좋은 마사지를 받다 보면 나는 늘 까무룩 잠에 들고 만다는 사실을. 한 시간의 마사지를 다 받고 나오자 몸이 노곤한 듯싶으면서도 한결 가벼워졌다. 느낌 탓이었을까. 정말 몸의 아픈 곳곳들을 고쳐낸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구글맵에 그 마사지샵을 하트를 이용해 저장해 놓고, 그 마사지 가게 마사지사 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라더니 그 후로 5년이 지나서, 나는 이번에는 네팔 카트만두로 살러오게 되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첫 주말, 나의 구글맵에 저장되어 있는 그 마사지 샵을 다시 찾아갔다. 5년 만에 찾아간 마사지 샵은 리모델링을 해서 아주 깔끔해져 있었다. 두 개의 방 사이의 벽을 터서 8개의 마사지 침대가 들어가 있었고, 원래 베이지 색이던 낡은 벽은 초록 아보카도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 또한 흘러나왔다.


나의 인생 마사지. 오랜만에 찾아가서 마사지 침대에 눕는데 마음이 떨려왔다. 이 마사지 하나 때문이라도 다시 카트만두를 방문하고 싶었달까. 새로운 마사지사 선생님들은 20대 초반 혹은 30대 초반은 되어 보일까 하는 젊은 남자 선생님들이었다. 꾹꾹 눌려지는 압력 자체가 달랐다. 쥐어짜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지만, 강한 게 좋은 거라고 꽉꽉 누르던 그 손길을 참았던 것이 문제였다. 받고 나서 삼일을 아팠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근육이 파열된 것 같이 아팠다. 꼭 헬스장에서 무게 치고 나서 느껴지는 그런 근육이 찢어진 듯한 느낌. 몸살 기운처럼 3일을 앓았다. 자는데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누우는데도 곡소리가 났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어서 마치 어린아이들이 다리부터 침대에서 내려오듯이, 혹은 강아지들이 뒷발을 바닥에 먼저 딛고 내려오듯이 일어나야 했다.  


'마사지를 잘못받으면 큰일 나겠구나'라고 느꼈던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 인생 마사지 집을 잃을 수는 없었다. 다시 나와 맞는 선생님을 찾으리라, 아니면 새로운 선생님과 서로 맞춰가리라 심기일전 한 뒤 다음 주 주말에 다시 그곳에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리고 몇 달 동안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코로나였다. 그 이후 네팔에 또다시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세 번째까지는 셋 지만, 그 뒤로부터는 몇 번째 재유행인지 세기를 멈추었다) 그곳을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서 코로나가 나아지기를, 그래서 다시 해골 달린 그 4층 옥탑방, 내 인생 마사지 집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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