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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Jan 19. 2024

나도 운이 좋았지

나는 운이 좋았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이별을 한다는데
나는 운이 좋았지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던 사랑을 했으니까
나는 운이 좋았지
서서히 식어간 기억도 내게는 없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한없이 사랑한 날도 우리에겐 없던 것 같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스친 인연 모두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으니
후회는 하지 않아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권진아님의 <운이 좋았지> 가사 도입부. 강한 긍정은 부정이 될 수 있듯 “나는 운이 좋았지”가 반복될수록 애절함은 깊어진다. 동시에 “스친 인연 모두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으니 후회는 하지 않아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 부분에선 한없이 부정과 슬픔이 가득한 이별이란 것을 운이 좋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본다. 이 새로운 관점. 부정을 긍정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은 말이야 쉽지만 정말 쉽지 않다. 어쩌면 광고 기획서에 녹일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고통과 비슷할 테다. ‘당신과 이별해서 슬퍼요’ 대신 ‘당신을 만났던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어요’가 더 심층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지 않나. 이처럼 우발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자기합리화가 깃든 감정을 찾고자 하는 게 멘탈 관리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나에게 23년도는 다사다난했기에 자기합리화 또한 넘쳐났던 해이다. 회사가 다른 곳에 인수된다는 사실엔 새로운 사람들에게 광고를 배울 수 있겠다는 합리화를, 회사 간 계약이 미뤄지는 상황에 대해선 놀면서 월급 받고 있다는 합리화를 했다. 그러다 결국 합리화로 메울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없어진 건 현실에서 가능한 각본이었다. 휴가로 일본에 가기 3일 전 금요일, 갑작스러운 고위급 인사와 직원들의 미팅이 잡혔고 회사 간 계약 불발로 기업 청산이란 수순을 밟는다는 소식을 통보받았다. 월요일에 개별 면담이 예정되었지만, 일본에 있을 난 미리 마음의 결단은 내려놓아야겠단 생각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아니 고위급 인사와 미팅이 끝났을 때만 해도 위로금을 받고 이직해야겠다란 생각이 지대했다. 갑자기 내가 다른 직무를 해야 한다는 건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일본에서 잠시나마 회사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지냈다. 그러다 비대면 면담 날짜가 다가왔고 불안함에 잠을 설치며 여러 가설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퇴사를 선택할 때 느낄 감정과 이미 면접 본 회사로 이직할 때 생길 상황들. 그리고 모기업에 마케터로 직무 전환한다면 새롭게 일을 배우는 상상. 도저히 혼자 판단하기엔 버거웠다. 평소 전화 한 통 하지 않을 누나한테 연락하고 부모님은 물론 전 팀장님, 동기까지. 전화를 돌릴수록 어떤 결심을 할지 뾰족해졌다.


 3년간의 카피라이터는 잠시 쉼표를 찍고, 새로운 직무에 도전하기로 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위로금에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지인들과 통화에서 얻은 결심도 있지만 안정성이란 측면에서 생각해 보니 고민의 답이 명확해졌다. 수년간 불안한 광고 시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여기저기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은 빈번했다. 경기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건 아무래도 광고일 테니까. 광고를 집행하려는 회사가 현저히 줄었고 놀고 있는 광고대행사가 늘은 걸 보며 지금 시기에 새 직무에 발 담가봐도 괜찮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오늘이 내가 가장 젊은 날 아닌가. 배우면 금방 배울 수 있는 DNA가 가장 팔팔한 나이일 테다. 이렇게 상처 난 곳에 후시딘뿐만 아니라 동방 약초까지 다 덧바른 덕에 새살이 돋고 굳은살이 생겼다. 곧 선택해야 할 다짐이 걱정되지 않고 설레었다. 그저 내가 선택한 3지망 내 부서에 배치되고 좋은 팀원들이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가수 권진아 못지않게 나도 운이 좋았다. 경쟁이 치열했던 팀에 운 좋게 배치받았고 그 팀에는 운 좋게도 착한 사람들이 넘쳐나기로 알려진 곳이었다. 긴장이 온몸을 감싼 나에게 긴장하지 말라는 숙제를 주지도 않고 밝은 미소로 반겨주시는 걸 보고 소문이 사실임을 알았다. 달리진 회사 층수처럼 모든 시스템이 바뀌었다. 정말 같은 건물만 쓸 뿐 모든 게 달랐다. 인턴 때로 돌아간 듯 처음부터 배웠다. ‘이건 마우스야’를 버금가는 친절한 과외 덕에 적응하기 수월했다. 하루종일 긴장하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입사 동기들 눈 밑엔 다크서클이 상주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옅어졌고 몸도 가벼워지고 퇴근 시간이 금방 다가왔다. 오늘도 그렇다. 벌써 목요일의 퇴근길이라니…! 본격적으로 일도 개입되고 있다. 몇 번 일을 해볼수록 카피라이팅이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되는 걸 느낀다. 팝업스토어를 기획할 때 팝업의 컨셉과 콘텐츠는 무엇일지 아이데이선 하는 건 꽤나 반짝이고 설득력 있는 크리에이티브를 요구한다. 아이데이션은 매번 해오던 거니까 재밌었고 괜찮은 컨셉워딩이 여럿 나왔다. 운이 좋게도 제시한 컨셉이 셀렉 되었고 혹시 몰라 준비한 팝업 내 콘텐츠 예시까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역시 카피라이터 출신이라 다르다”란 말을 들었을 땐 차마 환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해주시는 선배가 있는 팀이라는 것도 고맙고 다행이란 생각뿐이다. 하루하루가 새로울 날이겠지만, 두려울 날이 아닌 것에 대만족하기로 한다.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가야지. 그러면 어제보단 오늘 더 적응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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