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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월이 Dec 16. 2023

물건 줄이기. 삶을 정돈하는 집착에 대하여


대체로 물건이든 옷이든 오래 쓴다. 일반적인 수준의 오래 씀을 넘어 친정엄마가 처녀 적 입었다는 치마를 좋아해서 결혼할 때 가져와 10년 넘게 입다가 남편이 얘기하고야 깨닫고 처분했다.(옛날 옷들이 질이 좋은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엄마가 사줬던 겨울 롱 코트도 15년 넘게 입다가 코트 아랫부분이 전열기구에 탔는데 줄여서 반코트식으로 몇 년을 더 입고야 새 옷 좀 사자는 남편 성화에 정리했다. 


옛 미신 중에 각 물건, 공간마다 깃든 귀신이 있다는데 물건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거나 정을 두면 귀신이 깃든다고.. 아마 내 물건엔 오래된 귀신들이 많이도 붙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00치마 귀신, 코트 귀신 이런 식으로.


원체 물건을 오래 쓰는 데다 잘 못 버렸는데 쇼핑, 구입을 안 하는 건 아니니(물욕이 없어서 평균 이하로 사긴 하지만)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입는 옷은 1/30인데 엄마가 안 입는 옷들도 가져다 걸어두니(엄마는 옷도 잘 사 입고 세련된 스타일) 가뜩이나 작은 옷장이 빽빽했다.




집을 내놔도 10년 넘게 매매가 안돼서(작고 엘베 없는 5층 빌라라서?) 갑갑함을 달래려- 이사를 못 가니 공간이라도 넓히자고 생각을 돌렸다. 성격상 tv에서처럼 단시간에 죄다 버리자~!가 안되는지라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당근'과 중고거래도 적극 활용했다. 한 번도 안 입으면서 아끼는 옷, 고질적으로 모아두는 예쁜 상자들, 안 쓰는 화장품, 새 물건들을 주변에 나눠주고 팔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생각날 때마다 구역을 나눠서 버릴 거 찾고, 쓰지 않을 사은품은 안 받고, 몇 달 전 정리한 곳도 다시 꺼내 훑어보면서 몇 번이나 경계에서 구조된 옷들도 결국 내 놓을 수 있게 되고, 안 입어도, 안 써도 예뻐서 소유하고픈 '미묘한 소유욕'들을 점점 더덜어내게 되었다.



어떤 일을 스스로 오래 하기 위해선 재미를 느끼거나 동기, 의욕이 있어야 한다. 물건을 조금씩 지속적으로(이게 가장 중요) 줄여가는 가장 큰 재미이자 동기는 좁은 공간에 바람길이 나고 여유가 생기면서 내 기분이 가벼워진다는 데 있다. 삶의 무게가 덜어지면서 굉장히 홀가분해진다.


물건을 줄인다는 건 나한테 필요하지 않은 것, 안 쓰는 것, 없어도 되는 것, 정이 없는 것 =어떤 식으로든 그냥 자리만 차지하는 '짐'을 덜어낸다는 뜻이다. 매일 쓰거나 자주 들여다보거나 소중한 것들은 정리 대상에 아예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건을 정리해 간다는 건, 내가 사는 공간 속에 점점 더 내가 좋아하고,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만 함께 남는다는 게 된다.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선 집착해야 한단 생각도 든다. 초반 몇 년간은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집착했다. 심한 강박처럼 보물 찾기 하듯 버릴 물건을 찾아냈다. 꽤 어릴 때부터 환경이나(실천은 못하면서도) 아나바다 운동, 물건의 쓰임(쓰임이 다하지 않았는데 빨리 버려지는 물건에 죄책감이 든달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학생 때 중고거래를 시작했고, 20대 초반에도 지금은 없어진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여러 거래자들과(나 빼고 모두 애 엄마들) 모임도 갖고 했다. 



엄마가 맥시멀 리스트(정리 정돈 못하고 물건을 쟁여놔야 맘 편한 타입)라서 잔뜩 쌓인 물건들은 언제나 스트레스였다. 알바로 이사일을 하시는 지금도 멀쩡한 물건들을 가져다 놓으시고 나눠주신다. 뭐든 필요한 건 가져가라 하시고 막상 잔뜩 사놓고서 물건 집착이 없는걸 보면 그냥 사는 행위와 나눠주는 게 좋으신 걸지도.

지금도 가끔 가서 유통기한 지난 거 오래된 거 뒤잡이하며 버리면 너도 병이라고 너무 버리는 것도 복 없다 하시는데,, 계속 그러니 나 따라 이것도 버려라 하신다. 물론 그때 뿐이지만. 




정리 대상은 크게 어렵지 않다. 가장 기본은 위에서 말한

나한테 필요하지 않은 것, 안 쓰는 것, 없어도 되는 것, 정이 없는 것   


의류는 웬만하면 버리거나 기증한다. 몇 년간 당근 거래로 줄였지만 나가는 속도보다 보유기간이 더 길고, 5천 원 정도에 껀껀이 들이는 시간 비용과 싼 옷일수록 까다로운 거래 고객이 많아서 중고 판매는 가격이 나가는 제품만 팔게 됐다.  

전에는 이왕이면 사은품이 붙은 물건을 샀지만 안 쓰는 사은품은 받지 않는다. 그거 거절하는 기분 의외로 좋음.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다시 읽고 싶은 것만 산다. 사서 읽다가도 앞으로 더 안 보겠다 싶은 건 기증하거나 중고서점에 판다.(큰 책장 2개가 작은 책장 절반도 안 차게 줄었다)  

호기심 가는 물건은 사보고 맘에 안 들면 재판매한다.(구입 전 중고로 너무 많이 나와있는 유행 타는 제품은 제외) 완전히 소유를 결정하기까진 설명서, 박스를 버리지 않는 편.   

새 물건을 들이면 그만큼 버리려고 한다. 아니면 낡은 걸 교체할 때 사거나.  

게임하고 OTT 보는 게 낙인 우리라서 결혼 16년 만에 TV는 큰 걸로, 냉장고는 빌트인용 더 작은 걸로 바꿨다. TV도 작아진 냉장고도 아주 만족. 특히 냉장고는 커질수록 식자재를 쟁이게 되는데 고민 끝에 작은 걸로 바꿨더니 좁기는커녕 쟁이는 습관이 줄어서 공간을 더 넓게 쓰고 있다.  

어떤 식이든 새 물건이 생기면 언젠간 쓰겠지 하고 당연하게 넣어뒀는데 지금은 선물도 일단 감사히 받고, 안 쓰거나 몇 개월 내 필요 없을 물건은 주변 필요한 사람에게 다시 선물한다. 나보다 더 잘 쓸 사람에게 주는 게 선물한 사람에게도, 물건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선물의 선순환.  

흔히 말하는 '예쁜 쓰레기'는 눈으로만 보고 사지 않는다. 매장에서 볼 땐 너무 예쁘지만 쓸데도 없고, 어디 놓아도 보지 보지 않게 되고 그냥 무관심한 배경이 되니까.  




물건 줄이기는 영역, 유형, 사람으로 확장된다.  

유형의 물건에서 무형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안 읽고 쌓아둔 이메일, 오래된 서류 파일, 오래 안 가본 사이트 스크랩들  

당연하게 나갔던 고정지출도 꼭 필요한지 따져보고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 -보험 관리, 불필요한 보험 특약 해지, 알뜰폰 요금제, 대출원금 상환 등  

버리고 정리하는 것도 시간 투자를 해야 하는 일이라 소비할 때부터 그냥 갖고 싶은지, 필요한 물건인지를 따지면서 소비의 질이 달라진다. 그냥 생각 없이 사던 소비습관이 없어지고 생각하면서 사게 된다.  

불필요한 물건을 자잘하게 사기보다 좋은 물건을 신중히 골라 1개를 사게 된다. 이렇게 구입하면 구입만족도와 애정이 더 오래간다.   

일상이 되는 꾸준한 습관은 가까운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처음엔 유난하다고 반대하거나 방관하는 가족도 복잡스럽던 집안이 서서히 넓어지고 밝아지면 조금씩 동참하게 되고 스스로 본인 물건을 줄이기도 한다. 가족뿐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도 영향을 받는다.  

살면서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다 보면 생각에서 불필요한 부분도 덜어내려 하고 인생을, 생각을 좀 더 심플하고 명료하게 살고자 노력하게 된다.   




물건을 줄여가는 건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는 것. 홀가분해지면 조금 더 가볍게 살고 싶어지고 더 더 본질에 가깝게 심플해지고 싶어진다. 집안을 값비싼 물건으로 가득 채우는 건 관심이 적다. 차라리 경험을 늘려서 내 생각과 가치관을 넓히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소유로 살겠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물욕이 적다한들 경치 좋은 넓은 집과 경제적 여유는 나도 좋아한다. 마음대로 살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좋아한다. 단지 자잘하고 예쁜 옷과 물건을 채우고 다시 그것을 치우고 그것들 속에서 사는 삶은 별로라는 거지. 그런 것들에 신경 쓰느니 경이로운 풍광을 보고 안 먹어본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100배는 더 좋다는 거지.



스트레스 받거나 마음이 심난할 땐 작은 구역을 뒤집어 놓고 물건을 정리한다.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전에 못 봤던 못쓰는 볼펜 하나라도 꼭 나온다. 그것보다 큰 것들이 계속 나온다. 물건을 사는 것보다 아이쇼핑을 좋아하는데 가끔 넘치는 옷들과 수억 개의 팬시와 알록달록 쓸모없는 물건들을 보면 '사람은 소비의 동물인가'싶어 아득해질 때가 있다. 끝없이 택배로 물건을 시켜도 충족되지 않는 욕망처럼 허무한 것도 없다.

물건은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 아귀처럼 커지는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앞으로도 저는 죽을 때까지 물건을 줄여갈 겁니다. 사람이 죽고 난 자리에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남는지.. 내가 죽고 나서 나를 보낼 사람이 너무 많은 물건을 정리하느라 힘쓰지 않길 바랍니다. 갈 때가 되면(갑자기 가면 하는 수 없지만) 가능한 최소한만 남겨놓고 가고 싶네요.


물건을 줄여가면서 가장 좋은 건 소중함의 우선순위에 근접하게 되고, 애쓰지 않아도 삶 자체가 정돈되어 가는 겁니다. 뭐든 너무 많으면 중요한 게 가려집니다. 조금만 가지면 만족도 행복도 쉽게 느끼지만, 많이 가질수록 부족하고 불안해져요. 난 더 더 가벼워질 겁니다. 그리고 더 많이 행복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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