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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Feb 23. 2021

선의의 거짓말, 그 옳고 그름을 논할 때.

영화 「페어웰」


[하얀 거짓말]


White Lie.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의의 거짓말.


이에 대해 찬성도, 그렇다고 반대도 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적절히 사용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며, 그 판단과 선택은 항상 개인의 몫이기에 상관할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 「페어웰」이 다루는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선의의 거짓말의 핵심은 '해를 주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페어웰」의 거짓말은 할머니가 충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자신의 병을 모른 채 편안한 마음으로 살다 가시도록 하기 위해 암 진단 사실을 본인에게만 숨기고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선의'에 포함되는 일일까.



환자에게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 「페어웰」의 거짓말은 그 권리들 중 '자신의 건강과 관련된 모든 결정에 대한 통보와 참여(알 권리와 자기 결정권)', '치료와 보호를 위한 비밀 유지(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자발적이고 정당하며 이해할 수 있는 의견 일치 없이는 어떤 절차도 수행할 수 없음(자기 결정권)'의 항목들을 위반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의도한 '선의'에 도달할 수 없다.


의료인의 입장에서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이상한 이 거짓말이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그럴 수도 있다'라던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와 사상에서 찾아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페어웰」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환자 본인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나서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이 많은 부모들에게 병을 숨긴다. 병이라는 것이 숨긴다고 숨겨지기는 하는가 의문이다. 이상 증상은 누구보다 환자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 말이다. 속여서 검사를 하고, 약을 먹이고. 결국은 들킬 수밖에 없는 거짓말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자위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환자가 가족을 위해 모르는 척 속아주며 배려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환자의 권리가 무시되는 경우 중 가장 심각한 사례는 환자 본인이 DNR에 동의한 경우에도, 막상 환자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의사결정을 하지 못할 때, 그의 가족과 보호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이 충분히 가능했을 때 환자 본인이 결정해둔 의사는 완전히 무시된다. 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일들이 관습과 관례로 인해 묵인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지 못하는 가족들의 미련이 환자 본인의 결정권보다 더 중요한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DNR; Do Not Resuscitate. 소생 금지, 심폐소생술 거부. 환자의 요구로 호흡정지 등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심폐소생술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한 것.)


'환자를 위해'라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위한 것인지, 거짓말을 하는 입장에 놓인 자신을 위한 것인지 판단해야 할 때다. 사소한 거짓말 하나가 '선의의 거짓말'로 포장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큰일도 '선의'라는 명목 하에 놓여 결국 그 모든 피해와 고통이 환자에게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과 문화, 그리고 답습]


유교 사상의 잔재는 동양권 나라들에 아직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 맞지 않고, 젊은이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갈등의 원인이 되며 점차 그 설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가족 중심주의'일 것이다.


"요즘 애들은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내뱉는 어른들을 종종(실은 자주) 마주한다. 가족이나 친지들 사이에서도, 직장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 말은 개인보다 단체를 우선시하는 전체주의, 즉 가족주의 속에 녹아 살아온 현재의 노년층과 중장년층의 입에서 나오며, 그들은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전체주의를 강요하고는 한다.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불합리하다 여겨질 정도의 희생까지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협박이나 폭력이다.




빌리가 할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숙부가 가족이 결정한 일에 따르라고 윽박지르던 장면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한 작은 할머니에게서 할머니도 할아버지에게 똑같은 거짓말을 했음을, 그러니 할머니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가족들을 이해할 것이라 말하는 장면에서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을 '지금까지 그래 왔기 때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답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문화는 바뀌기 마련이다. 물론 후대로 계승되어야 할 좋은 문화와 풍습은 그 가치가 받아들여지는 시대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뒤 세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치가 되어버린 것들은 흐름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도기는 있기에,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마지막 빌리의 심경 변화가 이제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민]


언젠가 이민을 꿈꾼 적이 있다. '적어도 해외에서 1년은 살아보자'라는 소원을 한처럼 품고만 있던 중, 이러다 평생 대한민국 좁은 땅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나라 땅에는 발도 몇 번 못 디뎌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 무렵, 급작스레 일을 그만두고 집을 내놓고 그렇게 무작정 출국을 했다. 1년이면 될 줄 알았던 떠돎은 짙은 아쉬움에 2년 반을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외국인이 되어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고 무엇보다 자유롭지만 동시에 힘듦의 연속이었다. '외국인이라서' 허용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 '외국인이기에' 제한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제약이 많지만 그 안에서는 한없이 자유로운, 소위 '놀고먹는'(물론 일도 했다) 몇 년이 끝나고, 결국 다시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소망하던 외국 생활을 한 뒤, 이민이라는 잡히지 않는 목표를 포기한 채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 끼리끼리 어울려 사는 것, 동족이라는 것, 같은 문화 속에 산다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과 소속감을 준다. 외국 유학, 워킹홀리데이, 이민 등의 이유로 (혹은 배낭여행 등의 이유로 꽤 긴 기간 동안 외국에 머문 경우를 포함하여) 낯선 문화 속에 던져져 본 경험이 있다면, 자유로움 속의 고독함과 이상하게 겉도는 기분, 그리고 알게 모르게 당하는 차별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길어봤자 1년 혹은 몇 년, 돌아갈 곳과 의지가 있어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이들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평생 그곳에 뿌리내리리라 굳은 다짐과 결의로 낯선 땅에 정착하려는 이민자들의 사정은 비참하다. 고난의 연속이다. 낯선 이들 사이에 자리 잡고 그들과 동화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1세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의 시간은 그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땅에서 태어나 자란 2세, 3세들은 그 고통이 줄겠지만,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빌리는 이민 2세대로, 사실상 미국인과 다름없다. 그러나 중국인 부모의 영향 덕에 중국 문화가 낯설지만은 않다. 2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서양권에 있는, 인종이 동양인인 이들은 그 나라의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소외와 차별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까지 느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이 영화는 빌리를 통해 중국에 있어도, 미국에 있어도,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 있는 그들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가족 중 누군가가 미국으로 이민 간 빌리의 가족과 일본으로 이민 간 숙부 가족에게 외국으로 떠나버린 것에 대한 비난을 하는 대사가 있다. 나 하나 잘 살겠다고 외국으로 다들 떠나버리면, 정작 본인의 나라는 발전하지 못한다며 이민자들을 탓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나는 반대로 가족과 나라를 떠난다는 인생 일대의 결정이라는 이민을 선택하는 혹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심정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미나리'에 대한 기대가 크다.




[장점]


이민자들의 여러 상황과 정체성을 다루며, 죽음과 그에 대한 문화 차이, 세대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 내용 자체는 아주 좋다. 중국의 음식이나 결혼식의 풍경 등의 관습과 문화를 보여주는 것도 영화 취지에 적합하다. 선의의 거짓말을 소재로 한 점도 (비록 그것이 적합하지 않더라도) 신선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하! 하!' 기를 넣는 장면이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가족들이 다 함께 (우리나라로 치자면 '자기소개하기'에 해당하는)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원을 그리며 빠르게 돌고, 인물들의 모습이 차례로 비치는데, 게임 참가자는 남녀노소 상관이 없다. 이점이 가장 마음에 들어 인상 깊게 남은 것 같다.


마지막에 빌리가 할머니를 끌어안고 흐르던 정적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음악]


영화 「페어웰」에서 최악의 부분이 음악이다. 노래들이 영화와 어우러지지 못하고 거슬리며, 오히려 집중을 방해한다. 분명 아는 노래들 이건만, 가수가 달라 그런 걸까,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노래인 걸까, 볼륨이 커서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지만 어찌되었건 음악 자체가 매우 부적절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노래가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고 싶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엔딩곡은 영어와 중국어가 뒤섞이고, 솔로와 합창을 오가는 정신 사나운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난잡한 가창 형태는 오히려 영화를 본 후 감상을 정리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될 뿐이다. 이런 음악을 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좋은 음악들로 조화롭게 만들면 어땠을까 하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덧, 진단 6년 후에도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시다는 소식은 기쁘지만, 해피엔딩까지 도달하기 위한 그릇된 방법이 쉽게 이해되고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마지막 영상을 넣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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