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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May 10. 2021

폭력의 전시,짙게 남은 불편과 아쉬움(을 넘어선 분노)

영화 「인플루엔자」


긴 글에 앞서 간략하게 말하자면,


간호사 세계(혹은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태움’(혹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싶었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 방법이 한참 잘못되었다. 연출, 대사, 전개 방식, 각본, 미장셴, 음악, 모든 요소가 총체적으로 엉망이며, 내용 또한 간호사가 아니라 철 지난 여자 깡패 이야기다. 강력하게 추천하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영화 비판을 위해서만이 아닌, 오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호사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대변하고자 함임을 미리 밝혀둔다.


실제 간호계의 현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져야 하는 이유는, 즉, 영화의 자유로운 범주인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너그러이 봐줄 수만은 없는 이유는, 황준하 감독 본인이 여러 차례에 거쳐 분명하게 ‘메디컬 영화’라고 했기 때문이다. 타이틀을 걸었으면 그만큼의 노력과 책임감을 가져야 함이 마땅한 일 아닌가? 



[간호사와 태움]


간호사의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태움’이라는 것 또한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몇 년 전부터 수면 위로 드러나 이슈가 되고 있는 이 고질적인 문제는 간호사로서 부끄러울 만큼 간호사 세계에 팽배한 큰 사회적인 문제다. 그러나 소위 ‘태움’이라 불리는 이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은 병원 인력의 구조적인 문제와 인력난, 간호사라는 직업 특성과 그를 위한 ‘하드 트레이닝’ 등의 복합적인 원인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트레이닝 자체보다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그 방식이 잘못 변형되어 적용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하여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인들은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단시간 동안 업무에 완벽히 적응해야 한다. 어떠한 사소한 실수라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며, 그 문제는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다루는 책임감은 의료인이 아닌 사람은 피부로 느낄 수 없는 무거운 것이다.


의사들은 대학 시절부터 엄청난 공부에 허덕이며, 인턴을 지나 레지던트를 끝낼 때까지 정말이지 ‘생고생’을 한다. 경력이 쌓이고 교수가 되어서도 배움은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질병과 환자들은 넘쳐나기 때문에 공부와 연구를 멈출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힘든 그 과정을 모두 겪어야 의사가 될 수 있다.


간호사도 마찬가지다. 대학시절부터 반 학기 만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다 치러야 하며, 남은 반 학기에는 실습을 한다. 매일매일 쪽지시험이 있고, 공부해야 할 것은 산더미인데, 과제도 많다. 실습 때부터 이미 환자들에게 상처를 받는 이들도 많다. 물론, 이렇게 대학시절 고생을 한 덕에 다른 학과보다 취업이 수월하다는 장점은 있다. 그러나 취업에 성공하여 병원에 출근하면, 그때부터 새로운 지옥을 맞이하게 된다.




환자와 보호자, 의사, 원무과, 약제과, 각종 검사실, 이송 요원, 조무사 등... 병원 내 모든 이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 간호사이며,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계속해서 모든 곳에서 많은 이가 나를 불러 댄다. 할 일이 쌓여서 화장실도 못 가고, 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 매일을 굶는데, 퇴근은 멀기만 하다. 4년을 넘게 일하면서 제시간에 퇴근한 적은 20번도 안 되는 것 같다 (응급 상황이라도 발생하는 날에는 그냥 집에 가길 포기하면 된다.). 업무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그 업무에는 온갖 잡무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지옥에서 홀로 환자를 맡아 일을 하는 ‘독립’이라는 것을 하려면 최소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한데, 간호 인력은 그 시간을 기다려주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이라, 1개월 만에 독립시키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력은 부족하고 환자는 넘쳐 난다. 할 일은 많고, 실수란 용납할 수 없으며, 빠른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 간호사는 무조건 똑똑해야 하고,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내는 손 빠른 멀티 태스커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이제는 사람들 비위까지 맞추는 서비스 정신까지 갖추라고 한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다른데, 간호사라는 이름 하에 짜인 규율과 틀 안에 욱여넣어진다. 이 과정은 트레이닝을 받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주변 동료들에게나, 모두에게 힘든 과정이다. 이 힘들고 고된 과정과 업무로 인한 압박,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그만두는 간호사들이 넘쳐나고, 그 자리를 신입이 다시 채우며, 지옥 같은 과정은 반복된다. 간호사가 취업이 잘 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직률이 높다는 뜻이다.


신입은 업무가 미숙하므로 당연히 실수를 한다. 그러나 간호사는 신입이라도 실수를 하면 안 된다. 따라서 군대에 비교되는 엄격하고 관료적인 조직이 된다. 이 엄격함이 잘못된 방식으로 진행되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공공의 적이 된, 혹은 신입인 그 한 사람에게 모든 스트레스를 쏟아 낸다.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도 서러운데 모든 잡무를 막내라는 이유로 다 떠안는다. 이것이 ‘태움’의 시작이다. 물론 모든 간호사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간호사를 특수한 직업이라 분류하기 전에, ‘직장인’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같은 말이 된다. 어디에나 또라이는 있고, 어디에나 괴롭힘은 있다. 다만 간호사들의 태움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하드 트레이닝, 그리고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은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조직이 우선시되는 사회에 속해 있다. 담당 환자가 나누어져 있고, 환자와 관련 없는 업무들은 분담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병동, 더 나아가 병원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업무를 한다. 응급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모두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뛰어들어 처치를 돕는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보다 협력이 필요한 업무에 트러블이 발생할 확률이 훨씬 높다.


3교대라는 근무 형태 또한 문제의 원인이 된다. 개인적인 사정을 최대한 반영해 주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근무표를 이용해 협박을 하거나, 따돌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휴가는커녕 병가는 꿈같은 일이다. 여유 인력이 없기 때문에 수술하고 입원해야 하는 중증의 질환이 아니고서야 병가를 쓸 변명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일하는 곳이 병원이니, 출근 전에 진료를 보고 일을 한다. 심지어 심한 장염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과 탈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팔에 주삿바늘을 꽂아 수액을 끌고 다니며 일을 한 적도 있다(이럴 때는 진상 환자들마저 간호사 걱정을 해준다). 퇴근이거나 쉬는 날에도 전화를 받아야 하고 (당시 업무를 하던 담당 간호사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으며, 인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출근까지 감행한다. 이것 또한 태움에 잘 악용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간호사로 일하는 것은 정말 진심으로 너무나 힘든 일이다. ‘누구나, 어떤 직장이나 힘들다, 쉬운 사회생활이 어디 있냐’는 식의 말은 할 생각도 말아라. 다른 직업이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라는 직업이 가진 힘듦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단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해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정’ 하나면 된다. 많이 힘들지, 의 따스한 위로 하나면 된다. 


그러나, 영화 「인플루엔자」는 이 모든 것을 담아낼 노력조차 하지 않은, 고증과 취재가 엉망인, 현실 반영이 전혀 안 된 형편없는 영화다.




[감독의 태도]


이 영화가 비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영화 전체에 깔린 기본적인 감독의 태도, 그리고 인터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감독의 한계에 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문과 함께 ‘사실에 기반하였으며, 특정 간호계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차례로 보여준다. 영화를 알기 전 오프닝은 기대감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었으나, 그것도 잠시뿐, 영화를 다 본 뒤 떠올리는 오프닝은 들끓는 분노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준다.


왜 하필이면 ‘간호사’를 소재로, 타이틀로 내세웠는가? 이것은 ‘간호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8,90년대 혹은 더 이전의 군대, 아니면 조폭들의 이야기다. 영화 내내 난무하는 언어적, 신체적, 정신적 폭력은 얼굴을 붉히게 만들고 불쾌하며 저급하다. 영화가 끝나고는 드는 감정은 허무함과 어이없는 심정뿐이다.




출처 : 대한간호협회



메디컬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영화에는 전문직으로서의 간호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대로 된 고증이나 취재조차 하지 않고, 그저 ‘간호사들의 태움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기사 몇 개를 보고, 심각한 태움을 당한 간호사들 몇 명을 인터뷰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고는 ‘사실’에 기반했다는 파렴치한 주장을 내세운다.


나이팅게일 선서문을 왜 넣었나? 이런 선서를 하고 간호사가 된 너희가 그저 직장 내 괴롭힘만을 행하고 있다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비판하려 함인가?  메디컬 영화랍시고 ‘있어 보이고’ 싶어서 넣은 것인가? 성스러운 선서를 넣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불순한 의도에 분노가 치민다.





황준하 감독은 97년생이며, 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가족이나 친구, 주변 지인 중에 간호사가 없고, 간호학 개론이나 간호 관련 서적들을 보고 공부를 했다고 했다. 이 정보만으로도 영화에 깊이가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다.


영화가 끝나고 GV가 있었지만,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고, 염려되는 마음이 커 감독을 기다렸다. 1:1로 15~20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짧은 대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황준하 감독은 말 그대로 ‘어리다’는 것을. 우려의 마음과 무거운 책임감에 오랜 시간 고민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며 영화를 찍고, 오프닝의 문장을 썼다고 했지만, 정말로 그 책임감을 오롯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사실에 기반했다, 영화는 다큐와 다르다, 실제 간호사들에게 미리 보여주었다', 는 등의 변명만을 늘어놓았다.




당시에 대면하여 대화를 나눌 때, 최대한 예의를 갖춘 비평을 했다. 의도하는 바와 노력한 지점은 알겠으나, 표현 방식이 잘못된 것 같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며 폭력으로 인한 자극성만 짙게 남았다,며 상처가 되거나 비판만을 위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은 인정한다는 말 뒤에는 항상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더 이상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앞으로의 인터뷰에서 오해의 소지가 없게 잘 말해 달라고만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감독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에서 마저 변명만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몇몇 간호사분들은 깊은 공감과 관심, 위안을 느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몇몇 간호사분들에게서 영화를 불편하게 보셨습니다.’ ‘영화는 다큐가 아닙니다.’ ‘예산 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등등... 비판을 달게 받겠다며 올린 해명글 치고는 말끝마다 변명뿐이었다. 자신은 정말이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영화제에 초대를 받을 만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였다. 귀를 닫고 이해와 공감 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감독이 어떻게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 어떤 호평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호평할 부분이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얘네는 잘 봤고 공감하고 응원한다는데, 다큐도 아닌 영화에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난리야?”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럼 (어쭙잖은 실력으로 사실 팩트 들먹이지 말고) 다큐를 먼저 찍어보라고 말하겠다. 차라리 ‘사실’에 기반했다고 하지 말고, ‘픽션’이라고 인정한다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럼에도 짙은 불쾌함은 지울 수 없겠지만). 


사실에 기반했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간호사들의 모습을 눈여겨보지 않고,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에만 귀를 기울이고 눈을 모았으면서,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거니와 제대로 된 취재와 고증을 통해 반영하지도 못했으면서, 감히 팩트를 운운하는 것이 역겹다는 것이다.




또한 메디컬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싶으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이라고 말하고 싶다. 참고할 한국 메디컬 영화가 없으면 메디컬 드라마들이 있다. 한두 작품만 보고 배워도 최소한의 선은 지킬 수 있다. 그나마 최근 작품인 「슬기로운 의사 생활」만 보아도 그렇다. 사실에 기반한 픽션이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어설픈 의학 용어들과 실제와는 다른 모습들이 나온다. 그러나 의료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으며,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인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관찰하고 담으려 노력한 것이 눈에 보인다. 황준하 감독은 본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본인이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고 자료 조사를 하고 취재와 고증을 위해 애썼는지. 간호 전공 서적을 봤다는데, ‘책’으로 공부한다고 ‘현실’ 반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영화]


백번 양보해 간호사라는 직업을 떼어 놓고, 감독이 말한 대로 ‘사실에 기반한 픽션’만으로 영화를 본다 해도, 이 영화는 쓰레기다. 참고로 많은 이들의 노력이 들어간 영화 작품을 ‘쓰레기’라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는 이 표현을 꼭 써야겠다. 영화의 재미나 완성도 등에 의해 만듦새가 너무나도 미흡하여 최하점을 주는 경우와는 달리, 형편없는 감독의 태도나 정체성이 반영되어 영화 자체가 쓰레기 같아 평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경우들이 몇 있다. 예를 들면 「건축학개론」, 「나랏말싸미」가 있고, 이제 「인플루엔자」가 포함된다.


보통은 영화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영화는 영화니까. 그러나 그 영화라는 허용된 자유 속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적인 선은 있다. 이중적인, 포장된, 왜곡된, 거짓된 것들을 혐오한다. 그것을 의도한 본심을 가리고 착한 척, 개념 있는 척하는 것이 역겹다. ‘내로남불’의 행동을 하면서 깨끗한척하는 것보다, 차라리 쌈박하게 인정하는 편이 보기에 더 낫다(그렇다면 최소한 영화 자체만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본인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와 비판받는 이유를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딱하다. 그조차 무엇이지 모르고 있다면 더 큰일이지만 말이다.




폭력의 전시.

이 다섯 글자로 영화 ‘인플루엔자’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언어적,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폭력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시되며, 불쾌함의 극치를 달린다. 아무런 개연성이나 설명, 근거 없이 그저 보이기 위해 나열되는 폭력들은 그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좋지 않은 화질이나 음질 때문에 집중이 잘되지 않았으나, 예산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다소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다시 만난 세계’ 노래는 다른 음악이나 음향 혹은 대사와 볼륨이 맞지 않고 혼자 튀어 귀에 거슬리며, 어둡기만 한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욕이 대부분인 저급한 대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불만은 없다. 다만, 이런 감독이 디렉팅을 잘 주었을 리 만무하기에, 연기를 하며 배우들이 겪었을 어려움과 고충이 상상된다. 계속해서 욕하고 싸우고 때리고 맞고... 내가 배우였다면 이런 것도 연기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만 같다.




[거슬리는 장면들]


거슬리는 장면이 너무 많다 (의료인이 아님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한 부분들을 말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응급 상황은 일반인이 그리는 장면이므로 별말 안 하려다, 짚고 넘어가야겠기에 언급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의사는 맥박(Pulse)을 묻는데, 간호사는 혈압(BP)을 답한다. 심정지 상황도 아니고 혈압이 90/61이라는데(정상 범위에 속한다) 심폐소생술(CPR)을 하라고 지시하더니, 정작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실제 의사는 지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처치를 수행한다). 흉부 압박을 어떻게 배운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시행하는 모습이 코믹하기까지 하다. 또한 응급 상황이 터지면 경력자들은 신규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린다. “뭐해 어시해!”가 아니라, “ㅇㅇ쌤 ㅁㅁ하세요!”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일로 혼내거나 인격 모독의 언사를 행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응급 상황에서 그럴 사람은 드물며, 그럴 정신도 없다.


기관 삽관을 시도하는 실수를 범해 환자에게 상해를 가한 간호사(이 설정 자체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지만)를 찾는 보호자 앞에서, “내가 안 했어요.” “저 아니에요.”라며 눈짓으로 동료를 가리키는 모습은 혀를 끌끌 차게 만든다. 의료 사고에 해당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일단 화가 난 보호자와 잘못한 간호사가 아무런 대처 없이 대면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앞서 책임자가 나서 민원을 응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응당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책임자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동료애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개인적으로 원한을 살 수 있는 일 앞에서 신입 직원을 내던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환자와 보호자 앞에서 쌍욕을 하며 몸싸움을 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불쾌하고 모욕적이었다. 


수간호사라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 「인플루엔자」에서처럼 천박한 사람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러나 사직서를 찢어 버리고, 3개월 된 신규에게 또 다른 신규 교육을 맡기고, 결재문서로 머리를 때리는 몰상식한 수간호사는 정말 드물다. ‘체통’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더 많다.


엔딩은 더욱 기가 막힌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 앞에 있는 간호사의 모습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멍청이로 그려놨다. 다솔이는 3개월의 경험만을 가졌지만, 어쨌든 ‘간호사’다.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면 당연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경동맥을 짚어 맥박을 확인하고, 119에 신고한다 (간호사가 아닌 일반인도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 테다). 맥박이 없으면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행한다. 이건 1개월 된 간호사라도, 간호대학생이어도 안다. 물론 맞닥뜨린 상황에 너무 놀라고 무서워 머리가 하얘지며 정신을 못 차릴  수는 있다. 사람인지라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 있기에 몸이 얼어붙고 눈물이 나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다솔이는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부여잡고 오열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나올 정도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장면인가.


인플루엔자와 간호사의 태움 간의 연결 지점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상황 아래 놓인 간호사들의 태움을 연결 짓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과는 다르게, 영화 속에서의 '연결점'은 (단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다. 폭력의 나열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은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당연히 GV 때 질문으로 나온 지점이지만, 감독 또한 딱히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코로나 이전에 생각한 아이디어인데, 이미 작업 중에 코로나가 터져서 너무 힘들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억지로 끼워 맞춘 설정에 탄탄한 근거가 있을 리 만무하니,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마무리하며]


영화제가 아니었어도,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고 관심을 가지고 언젠가는 보고야 말았을 영화가 이런 졸작임에 통탄스럽다.


사회적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받고 영화제에 초청되며, 사실에 기반했다는 혀놀림에 현혹되어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둥 헛소리 같은 평을 받고 있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여러 리뷰들을 보며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아 이렇게 긴 리뷰를 쓰게 되었다. 전주 국제 영화제와 배우들의 필모그래피에 오점이 될 영화, 인플루엔자다.


고작 73분짜리,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감독의 영화 하나에 이렇게까지 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간호사의 이미지’. 유독 한국 사회에서 간호사는 소위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 말로만 ‘백의의 천사’라고 할 뿐,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된다. 간호사도 의료인임을 알리고자 인식 개선을 위해 많은 것을 노력해도, 유니폼을 입은 섹슈얼한 대상이나 동네 언니 취급을 당할 뿐이다. 이런 작은 영화 하나가 불씨가 되어 또 어떤 간호사의 이미지에 불을 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며 간호사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이 시점에 꼭 필요한 영화인지 되묻고 싶다.



덧붙이자면, 강도에 상관없이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 그 자체와 막내에게 많은 잡일을 시키는 부조리함에 개인적으로 맞서 싸웠다. 신규라는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막내들 보다 더 뛰어다니며 내가 속한 병동의 악습만이라도 뿌리 뽑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선배 간호사들의 미움을 샀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와 내 동기들의 노력은 작은 결과라도 가져왔고, 적어도 나는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되지는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사회적인 문제를 어떻게 바꾸냐고 묻는다면, 개개인 모두의 노력이 합쳐져야 가능한 일이라고 답하고 싶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함과 ‘나도 당했고 원래 그러던 거니까’라는 무책임함을 버리고, 바뀌고자 노력하는 간호사들이 하나 둘 늘어나길 바란다.




참고로 나이팅게일의 원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of the lamp)'이었다. 영국의 간호사로,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이며 군 의료 개혁의 선구자다. '백의의 천사'라는 별칭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순종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는 별칭의 이미지로 간호사들의 전문성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 간호사들도 예쁜 옷 입고, 예쁜 가방 들고, 구두도 신고 그러거든요. 반팔 티 청바지 백팩으로 멋없게 다니지 않거든요. 유니폼이 통일되어 있다고 사복까지 통일시킬 줄이야... 사실 이게 제일 기분이 나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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