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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Jun 03. 2021

저기 떠가는 튤립 모양 구름이 보이시나요?

영화 「튤립모양」



[흑백]


전주에서 만난 마지막 영화 「튤립모양」은 비 오는 날 잠깐 스쳤던 한국 남자를 잊지 못해 한국어를 공부하며 그를 찾기 위해 한국 공주로 무작정 떠나온 일본인 여자 유리코와 평소 동경하던 일본 배우 유코를 닮은 유리코에게 반한 한국 남자 석영에 관한 흑백영화다. 최근 흑백을 선택함으로써 영화의 장점을 극대화한 영화들, 예를 들면 「자산어보」와 「맹크」 등, 처럼 「튤립모양」 역시 흑백을 통해 우아함과 고풍스러움을 더하며 독특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는 흑백과 어울리게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하고 잔잔하다. 감정은 큰 요동 없이 미동하고, 드물게 등장하는 긴장마저 완만한 곡선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흑백에 타임 슬립의 판타지 요소를 가미하여 배경이 되는 정확한 시대를 알 수 없게 만들어 신비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색을 없애고 명암만으로 영화를 표현하는 방식에 매력을 느끼고 있자니, 아직 보지 못한 「로마」가 떠오른다.




[영화]


잔잔하다. 잠시 스쳤던 남자와의 인연을 믿고 덜컥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 공주라는 낯선 나라의 새로운 땅에 도착한 유리코의 대담한 행동과는 달리 영화를 지배하는 감정은 고요하기만 하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에서 와인잔이 바닥에 구르는 순간마저도 조용하기만 하다. (유리 외에 큰 소리나 높은 어조의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 또한 없다.)


그러나 정적이고 느리게 진행되는 흑백의 화면 안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인연을 향한 무모함, 설렘, 반가움, 사랑, 로맨스, 애정 어린 눈길과 조심스러운 손길, 따뜻한 포옹, 흔들리는 눈동자와 다급한 발걸음, 허공을 떠도는 마음과 자꾸만 발목을 잡아당기는 미련. 많은 감정과 행동들이 고요하지만 분명하게 담겨 있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며 힐링의 순간을 경험했다. 대사가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생략된 공백이나 1.37:1 비율의 화면에 의해 석영이 즐겨 보는 일본 무성 영화의 느낌이 가득하며, 인물 없이 비치는 자연 풍경과 그 안에 녹아든 바람 소리와 새소리들은 기계 소리에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다만 영화 자체가 고요하고 느린 호흡을 가지다 보니, 중간에 깜빡 졸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제목인 ‘튤립모양’은 사실 ‘튤립’보다는 ‘모양’에 주된 의미가 있는 듯하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모양’이라는 것에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형상, 이미지, 기억, 상상 등의 모든 소재를 담고 있다고 했다.


하늘에 흘러가는 저 튤립 모양의 구름은 지금 내가 보기에는 튤립 모양이지만, 흘러 흘러간 곳에 있는 이가 본다면 여전히 튤립 모양일까? 모양이라는 것은 한결같지 않으며, 변하고, 때로는 눈속임으로 우리들을 착각하게 만든다. 유리코가 석영을 자신의 운명이라 착각했던 것 또한 기억 속에서 곱씹고 곱씹다 왜곡되어 버린 모양이나 되뇌던 그리움이 너무 커져버려 착각한 목소리의 모양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다인 배우]


영화 「튤립모양」이 가지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배우 유다인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GV에서 양윤모 감독이 배우 유다인을 캐스팅 한 이유는, 이미지, 특히 무언가를 오랜 시간 기다린 것만 같은 맑은 우수를 담은 눈 때문이라고 했다. 캐스팅의 이유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영화에서 클로즈업으로 인물이 화면 가득 채워질 때마다, 유다인 배우의 맑고 깊은 큰 눈은 모든 감정을 말해주는 듯했고, 그 감정은 스크린 밖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특히 감탄한 것은 일본인이 말하는 한국어를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이다. 미묘한 발음과 억양을 그대로 살려, 관객으로 하여금 아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일본인 배우인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 정도였다. 예상대로 유다인 배우는 억양 연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녹음을 하고, 일본인에게 코칭을 받으며 억양을 연습하다 보니, 연기를 처음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노력을 통한 연기 앞에 ‘차라리 일본인 배우를 캐스팅하지 그랬냐’는 우려는 싹 사라진다.


최근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도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유다인 배우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양윤모 감독]


영화를 다 본 뒤 이어진 GV에서 양윤모 감독이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누가봐도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튤립모양」의 분위기는 양윤모 감독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감독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오롯이 갖춘 인상을 풍겼다.


질문 하나하나에 침착하고 섬세하게 대답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설명하는 감독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진중한 태도로 영화와 GV에 임하는 자세가 앞으로의 영화들까지 기대하게 만들었다.




[김다현 배우]


나에게는 사실 ‘야다’로 더 익숙한(나이대가 어느 정도 밝혀지는 것 같지만…) 김다현 배우를 스크린에서 만나니 느낌이 새로웠다. 아직 뮤지컬에서도 만나 본 적 없는데, 영화에서 먼저 만나게 될 줄이야.


차분하고 담백한 연기와 담담한 표정으로 가득 찬 클로즈업 화면은 인상 깊다. 적극적으로 표출하거나 분출하지 않는 감정선을 따라가는 김다현 배우를 지켜보며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에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





[독립영화관]


사라져 가는 독립영화관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로맨스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멀티플렉스가 들어오기 전, 초등학생 시절에 ‘ㅇㅇ극장’이라 쓰여 있던 영화관에서 가족들과 함께 「아이 엠 쌤」을 본 기억이 있다. 영화관이라는 곳을 처음 가본 데다, 제대로 영화를 관람한 것 또한 처음이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극장은 곧 멀티플렉스로 바뀌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 독립 극장을 찾은 적은 없다.


영화를 취미 이상으로 여기며 좋아하게 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독립극장을 찾게 된 지는 더욱 얼마 되지 않았다.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편견, ‘재미없고 우울한 이야기일 거야’라는 생각에 갇혀 볼 엄두도 내지 않던 시기가 지나고, 이제는 많은 영화들을 보고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독립 극장들을 찾기 위한 발걸음이 가벼이 느껴지지만은 않고, 여전한 영화 편식은 쉬이 버릴 수가 없다 (망작 느낌이 강한 한국 상업 영화들은 보고 싶지가 않다.).


독립극장들은   곳에만 있어서(왜인지는 사실 알지만…), 평일에는 엄두도  내고, 영화를 목적으로 보고 싶은 작품 여러 개를 연달아 보거나, 근처에 놀러  계획과 함께 영화를 보러  때만   있는 실정이다. 현실의 편안함과 타협하는  모습은 극장들을 응원하는 마음과는 별개임을 느낀다.


가끔이나마 찾아가며 꾸준히 응원하는 유는 그들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독립영화관에는 그곳에서만 느낄  있는 각각의 분위기가 있다. 아담하고 조용하며, ‘영화스러운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장소에 녹아들어 있다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작은 공간에서 열리는 GV 또한 소수의 관객들로 프라이빗하게 진행되어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들을 포함하여 관객들에게도 좋은 추억이 된다.


수도권에 있는 독립극장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멀티플렉스 3사가 장악하고 있으며, 그 멀티플렉스마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에 놓인 지방은 독립극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다. 주변에서 독립극장을 찾는 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 독립극장이 연명할 수 있는 방안을 무엇일까. 부자인 영화 마니아가 자선사업으로 극장을 운영한다면 모를까,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다.




개봉할지는 모르겠지만, 뻔한 영화에 지루해졌다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지만) 독특하고 새로운 매력을 주는 「튤립모양」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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