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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Jun 22. 2021

상실되지 않는 기억으로 베어 무는 사과 한 조각.

영화 「애플」



[영화]


머리를 찧는다.


따스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레이스 커튼, 차분한 인테리어로 따스한 분위기가 느껴져야 할 집에서 남자는 벽에 머리를 찧는다. 낮인데도 어두운 거실과 쓰레기로 어지럽혀진 탁자, 한동안 낮과 밤을 함께 한 것 같은 소파에서 남자는 멍하니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 뉴스를 듣는다. 외출하는 동안 이웃들과 옆집 강아지 말로를 만나고, 기억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않은 남자를 목격하고, 꽃을 한 다발 사고는 버스에서 잠이 든다. 버스 기사가 깨워 눈을 뜬 남자는 오전에 목격한,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조차도. 그렇게 신원 미상 14842번이 된다.



기억을 상실한다.

자신의 이름, 나이, 주소, 직업, 가족과 지인, 정체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취향은 남은 것일까 사과를 잘라먹는다. 사과를 좋아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맞은편 침대의 남자처럼 이 남자도 머리 정중앙에 통증을 호소한다. 자신을 찾아 주는 이가 없어 2주 동안을 병원에 머물다, 문득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인지 의사에게 떠날 방법을 묻는다.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

거처가 마련되고, 하루에 하나씩 미션이 주어진다. 상실된 기억에 갇히지 않고, 새롭게 배워나가듯 미션을 수행하다 보면 기억이 떠오르거나, 습관이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해도 새로이 출발하면 그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코스튬 파티와 술집에 가보고, 여성과 춤을 춰보고, 그러다 안나를 만난다. 안나 또한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기억 상실증 환자다. 안나의 미션들을 도와준다. 그리고 안나처럼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다. 미션으로 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노인을 만나고, 그 노인의 장례식장에 간다.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임시 거처를 떠나 아내의 무덤 앞에 선다. 집에 돌아와 사과를 먹는다.



[상실]


영화 「애플」 은 사랑하는 이의 상실과 기억의 상실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는 알리스가 기억을 상실하는 순간부터 실은 그가 기억을 잃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기억을 상실한 척 연기한 이유는 마지막 무덤 장면에 다다라서야 말해준다. 알리스는 부인을 잃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깊은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다, 아내를 상실한 기억을 상실하고자 기억 상실을 연기한다.


아마도 뉴스를 듣는 순간 결정했을 것이다. 일부러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들고 나오지 않았고, 실제 기억을 상실한 이들의 모습을 따라 했으며, 신분 증명용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컵 속 물건을 순서에 맞지 않게 말하고, 노래에 맞지 않는 상황을 고르는 등 기억 상실을 열심히 연기했지만, 동시에 알리스는 무수한 힌트를 뿌렸다.




사과를 좋아하는 취향이 변하지 않았고, 습관적으로 본래의 주소를 말하거나, 자전거 타는 방법과 운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서투른척했다. 안나나 술집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스킨십을 원하지 않았으며,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Sealed with a kiss’를 무심코 따라 부르고 (안나가 가사를 꽤나 잘 기억한다고 말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부르길 원한다), 트위스트 노래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며(아마도 부인과 즐겨 추던 춤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웃집 강아지 말로의 이름을 부르다 이웃집 남자가 다가오자 황급히 도망친다.


임종을 앞둔 노인에게 ‘여자가 있었다’고 대답하며, 노인의 부인이 기억 상실이 있어 본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집에만 있다고 하자, 알리스는 오히려 그 부인에게 잘 된 일이라고 한다. 배우자의 상실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니까. 노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기억 상실을 연기한 첫날의 목적지였을 아내의 무덤에 간다. 아내의 이름은 안나. 그래서 프로그램에서 만난 안나를 기꺼이 도와주었던 것일까.




Broken heart syndrom.

배우자 사별의 경험은 인생 최고의 스트레스라고 불릴 만큼 (알리스가 그 기억 자체를 상실하고자 했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한다. 남은 배우자는 수면 장애, 우울 에피소드, 불안, 면역 기능 장애 등을 동반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악화를 겪는다. 이렇게 큰 감정적 스트레스에 놓였을 때, 가슴 두근거림, 호흡곤란, 말초 부종, 피부 탄력 저하, 복수 등을 유발하며 심근병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일시적인 증상을 ‘상심 증후군’이라 한다.


알리스 또한 이러한 상심 증후군을 겪었을 테다. 노년기에 맞이하는 사별보다 젊은 시절에 맞이하는 사별이 더욱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울 테니, 우울과 공허 속을 오랜 기간 동안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본다. 상실의 기억을 공중으로 흘려보냈던, 다른 사람처럼 살았던 그 몇 주가 지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알리스는 차차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알리스의 눈동자에는 여전한 공허가 남아 있지만, 오랜 기간을 견뎌낸 사과의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아직 괜찮은 부분을 잘라 입속에 넣는 행위 자체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음향]


음향이 예술이다.


초반부 여자 의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임시 거처로 가는 길, 꽃처럼 번지는 불빛을 배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음악이 흐른다. 그 순간부터 귀를 기울여 사운드에 집중하게 된다. 섬세하고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음향은 미장셴과 더불어 영화를 황홀하게 만든다. 음향과 더불어 영화에 쓰인 음악들은 비교적 오래된, 60, 70년대의 것이며, 이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배가시킨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알리스가 수영장에서 다이빙하여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에코 가득 울리던 음악이 물속을 비추는 화면에 맞춰 물속에서 퍼지듯 불분명하게 들린다. 섬세함의 절정이었다.


소위 말하는 막귀임에도 불구하고, 황홀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운은 한참 동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든 건 분명 사운드였다. 최근 감상한 ‘사운드 오브 메탈’에 비유할만하며, 사실 더 극찬할만하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소리 자체가 영화의 주된 소재이기에 섬세하게 공을 들인 것이 당연하지만, ‘애플’은 소리가 중심 소재가 아님에도 너무나 훌륭했다. 황홀한 사운드가 머릿속을 맴돌아 결국 몇 번이고 영화관을 다시 찾았다.


혹여 앞으로 「애플」을 관람할 계획이 있다면, 귀를 쫑긋 기울여 보길 바란다.




[미쟝센]


깔끔하고 세련된 미쟝센이다. 차분한 느낌이 드는 알리스의 집,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들, 청결해 보이는 병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포근함이 느껴지는 임시 거처,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나열된 과일 가게, 나무들로 가득한 교외, 그리고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서있는 공동묘지까지. 알리스의 머리칼처럼 깔끔히 정돈된 느낌이다. 무채색의 바탕에서 무심함과 공허함이 느껴지는 탓에 요로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로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요로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제자라고 한다.)


차가운 도시 속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행동을 하는 프로그램 참여자들을 보여주는 탓에 얼핏 무심하고 공허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본적으로 영화 바탕에 깔린 색은 매우 따뜻하다. 백색의 빛이 비치는 병원이나 어둠이 깔린 무덤을 제외하고 나머지 장소들의 조명은 모두 주황색의 전구색이다. 임시 거처의 조명도, 코스튬 파티의 클럽과 거리도, 트위스트 춤을 추던 술집도 모두 따뜻하다. 춤추는 여자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곳의 조명은 빨갛다.


이 따뜻함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연결되어 있다. 영화 ‘애플’의 세계에는 스마트폰, 노트북, 카메라 등의 디지털 전자기기들과 SNS가 없다. 비대면적 소통이라고는 라디오, TV, 우편뿐이며, 기본적으로 대면 방식의 소통만이 존재한다. 지시사항은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녹음하여 우편으로 보내는 방식이며, 기록을 남기는 것 또한 폴라로이드 사진이다. 화면비 또한 폴라로이드와 같은 4:3 비율이다.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 ‘애플’이 가져다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따뜻하기만 하다.




[오랜만에]


매력적이고 애정이 가는 영화를 만났다.


올해  「스파이의 아내」 이후로 두 번째 취향 저격 만점 영화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150여 편의 영화들을 보았지만, 무언가 조금씩 아쉬운 마음에 별점 만점을 땅땅땅! 찍기는 쉽지 않았다. 후에 보고 또 보게 될 때, 누군가에게 추천할 때, 혹은 나의 만점 영화 목록을 훑어볼 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영화에 만점을 매긴 이유가 타당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영화들에만 만점을 매긴다.


덧붙여 점수를 매기는 이유는, 영화를 평가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 나의 기준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시간이 흘러 영화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졌을 때, 당시 남겨 둔 리뷰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대략적인 당시의 감상과 느낌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슬프고 공허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하고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영화  「애플」을 만나 행복이 또 하나 늘었다.


        



덧,


[매력포인트]


- 청소 중인 병원 복도에서 발 들고 콩콩 걷는 알리스


- 반짝반짝 작은 별 버스킹에서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 사과가 기억력에 좋다는 과일가게 사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눈치 보며 열심히 고른 사과를 내려놓고, 좋아하지 않는 오렌지를 한가득 사 오는 알리스 (그 오렌지는 페스츄리를 만들 때 사용되는 것이 정말 소오름)


- 진짜로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을 따라 하는 알리스


- 춤 안출 것처럼 위스키를 들고 점잖게 서있다, 트위스트 노래가 나오자 무아지경에 빠진 알리스 (여기서 제일 많이 웃었다)


- 안나가 운전하는 차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Seal with the kiss’ 노래를 계속 따라 부르고 싶어, 차를 멈추지 말라고 하다가, 노래 가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안나의 말에 바로 차을 세우라던 알리스


- 갑자기 코스튬 파티에서 기억을 상실한 신분 미상의 배트맨을 아는 사람이 없냐는 119 응급대원의 질문에 한마음 한뜻으로 캣우먼 코스튬을 한 여성을 쳐다보던 사람들


- 가장 높은 다이빙대에서 밑을 내려다 보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한 칸 내려와 또 아래를 내려다 보고, 결국은 가장 낮은 다이빙대에서 점프 (사실 수영장 바로 앞에 붙어 있는 점프대에서 뛰려나 했었다) + 알리스가 다이빙 후 물속에 있을 때 배경 음악 또한 물속에 있는 것처럼 흐를 때 전율 쫘-악!


- 나중에 모든 걸 알고 보면, 알리스의 모든 행동과 표정이, 특히 눈알 굴리는 것까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특히 노래에 맞는 상황 찾기 할 때 표정 정말 개구쟝이)


영화 ‘애플’의 매력을 많은 분들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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