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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Aug 02. 2021

죽음과 부활 그 사이에서.

영화  「피닉스」

 



얼굴.


칭칭 감고 있는 붕대에 피가 스며 있다. 당장 얼굴을 보이라는 미군의 윽박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과 새어나오는 신음을 감내하며 얼굴을 드러낸다. 미군은 이내 사과한다.


성형을 한다. 의사는 유명한 미인 둘 중 하나의 얼굴과 비슷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새로운 얼굴을 가지는 것에 대한 장점을 농담처럼 가볍게 내뱉는다. 정작 성형을 앞둔 여자는 예쁨에 조금도 욕심이 없고, 그저 예전과 똑같아지기만을 원한다.


폐허가 되어 버린 집을 찾아간다. 깨어진 유리 조각을 통해서야 새로운 얼굴을 확인한다. 본인의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며 절망한다. 거울에 비친 달라진 얼굴은 이리저리 뜯어봐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새 얼굴을 가지게 된 여자는, 새롭게 태어났다.




남편.


수용소에 끌려가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넬리를 버티게 만든건 남편 조니였다. 그에게 돌아가겠다는 희망의 끈 하나가 넬리를 지금 여기까지 이끌었다. 가족과 집, 얼굴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고 유산만 남은 넬리는 돈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남편 조니의 소식만이 간절하다.


조니는 10월 4일에 체포되었다가, 10월 6일 넬리가 체포된 직후 풀려났다. 조니는 10월 4일 이미 이혼을 통보했으며, 풀려난 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조니라 불리길 거부하며 요하네스로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아내였던 넬리의 유산을 노린다.


조니는 다른 얼굴을 가진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유대인.


조니는 유대인이었을 것이고, 넬리는 유대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먼저 잡혀간 조니가 어떤 밀고와 거짓으로 부인인 넬리를 유대인으로 둔갑시켜 자기 대신 수용소에 가게 만들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대사 몇 줄만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와 이웃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배신했다. 히틀러가 나치즘이라는 음모론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 유대인 차별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을 사람들이, 세뇌 당하고, 친구와 지인은 물론 심지어 가족까지 밀고하고, 잡혀 가고 죽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대학살로 많은 유대인들은 목숨을 잃고 머리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다. 히틀러가 굴복하자 그를 따르던 나치들은 처형되고 얼굴에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한 테이블에 둘러 앉은 즐겁고 정겨운 무리들의 사진마다 십자가와 동그라미가 혼재한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었다. 서로의 배신을 확인하고 복수를 할 겨를도 없이, 서로 죽어만 갔다.


풀려난 유대인들에게는 용서도 복수도 할 수가 없다. 무너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사라진 모든 것을 회복하고, 상처 받은 몸을 치료하고 영혼을 다독이며, 새로 나아갈 기반을 닦는데만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그런데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독가스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용서라는 말을 내뱉은 적이 없건만, 독가스를 살포한 자들은 이미 용서를 받았고, 남은 일은 평화와 재건이라고들 한다.


유대인이라는 인종은 무슨 죄가 있었던가.





연극.


넬리가 넬리를 연기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와 한 순간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 어설프게 자신을 연기한다. 레네가 조니의 배신을 알리지만, 불안함은커녕 오히려 새로 시작하는 설렘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넬리는 조니를 놓치 못한다.


얼굴 생김새 하나 변했을 뿐인데, 걸음걸이도, 필체도, 말투도, 목소리도, 손모양과 발모양도, 모든 것이 넬리인데, 조니는 다르다고만 한다. 끊임없이 넬리를 연기하라고 요구하는 조니는 돈에 눈이 멀어 아내도 못 알아 보는 것일까. 수용소를 거친 몸과 마음이라 그 모양도, 느낌도, 체취도 변해버린 것일까.


이 연극에는 맹점이 있다. 얼굴만 바뀐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와 얼굴만 바뀐 넬리를 단번에 알아 보는 다른 사람들. 친분이 그리 두텁지 않았던 여관 주인 부부마저 넬리를 알아보는 마당에, 서로를 사랑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남편만이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슬픈 연극은 조니의 바람대로 결말을 향해 치닿는다. 수용소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염색을 하고, 화장을 한 채, 빨간 원피스와 파리에서 산 구두를 신고 등장해야하는 넬리는 자욱한 연기에 잠시 휩싸인다. 레네의 죽음과 이혼 서류를 마주하고서야 조니의 배신을 인지한 빨간 넬리는 회색 연기 속에서 또 한 번 다시 태어난다.




피닉스.


넬리는 수용소에서 한 번 죽었다가, 얼굴에 관통상을 입고 살아 남았다.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났지만, 부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로 인해 또 한 번 가슴 아픈 죽임을 당한다. 모든 것을 알게되어 더이상 조니를 기다릴 수 없게 된 넬리는 연기 속에서 또 다시 태어난다.


마지막으로 조니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넬리. 자켓을 벗고, 팔을 감싸고 있던 드레스를 걷어 올리며, 읊조림으로 시작해 진심을 담은 노래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초록 속으로 사라진 넬리는 또 다른 삶을 맞이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죽음과 부활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불사의 삶을 산다고 하여 불사조라도고 불리는 피닉스에 빗댄 넬리의 삶을 바라본다. 무고한 그녀는 언제 어떠한 죄를 지어 타인의 의지대로 삶을 끝냈다 시작하며 끌려 다녀야 했을까.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가 고작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슬픈 사실을 왜 아프게 받아야들여만 했을까.


모든 것을 제대로 잃고 온전한 '제로'에서 시작해야하는 그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 레네를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인가, 피닉스처럼 불타올라 새로운 삶을 개척할 것인가. 트라우마를 안고 감당해야할 마음의 무게는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가벼워질까.





펫졸트.


3부작이라 불리는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먼저 제작되었지만, 개봉이 가장 늦었던 「피닉스」. 개인적으로, 2014년 「피닉스」, 2018년 「트랜짓」, 2020년 「운디네」의 제작 순서대로 어려웠다.

 그리고 세 영화 모두 독일의 역사와 맞닿아 있으며, 강렬하고 짙은 인상과 긴 여운을 남긴다.


「피닉스」는 한 번 보더라도 기본적인 이해는 가능하다. 중독성 강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Speak Low', 여러번 보아야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섬세한 연출들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대사들, 인물들의 표정 변화와 반전되는 분위기, 완벽한 엔딩 시퀀스가 이 영화의 매력이다. (엔딩씬을 보기 위해 이 영화를 3번이나 봤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짓」은 한 번 보면 대략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아직 N차를 하지 못하고, 재상영 막차를 탄터라 제대로된 관람을 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현대의 배경 안으로 소환된 제 2차 세계대전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리'와 죽은 작가의 신분을 훔쳐 탈출하려는 '게오르그'는 떠나는 자와 남는 자를 상징하며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운디네」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영화지만, 그만큼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이며, 처음 접한 펫졸트 감독의 영화다. 이전 작품들을 본 적이 없으니, 첫 관람은 낯설고 묘한 영화의 분위기와 도통 파악할 수 없는 내용 때문에 머리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신화 속 '운디네'와 베를린의 역사를 얕게나마 찾아본 뒤 다시 보니, 이 영화, 뭔가 달랐다. 신화와 역사의 기막힌 조합 속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몽환적인 분위기, 섬세하고 세련된 연출은 ‘펫졸트’라는 장르를 이미 완성한 듯 하다. '운디네!'라는 한마디의 외침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고, 자꾸만 영화관으로 가게 되었다. 운디네와 그녀를 부르는 요하네스를 마주하기 위해.


황홀하고 짜릿하다. 알게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은 감독의 작품 고작 세 편이 머리와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다니. 보면 볼 수록 영화의 진가를 알 수 있고, 보고 또 봐도 흥미롭고 흥분된다. 시간과 배경을 섞어 역사를 녹여내고,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자아내며, 빨간 원피스와 어깨에 닿는 파마 머리의 여인들로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앞으로 펫졸트 감독이 보여줄 세계에 대한 기대감에 심장이 요동친다.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다. 그저 영화를 되뇌이고, 또 되뇌이고, 노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할 뿐이다. 개봉한 영화는 많고, 상영 시간은 잔인한데,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기어이 또 이렇게 스크린 앞에 앉는다.


사실은 1회차와 2회차 모두 조금 졸았다. 너무나도 잔잔하여 또 이렇게 적응할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이미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이유를 머리로도 이해하겠다는 고집스러움과 이미 퍼져버린 중독성에 이렇게 또 보고야 만다.


또 가야지.


늦었다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빨간 옷의 넬리와 늦었음을 자각하고 충격과 슬픔과 죄책감에 눈이 벌겋게 달아 오르는 조니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끊임없이 나열되며 나즈막히 속삭이라는 'Speak Low' 변주들을 듣기 위해.




덧, 'Speak Low'의 가사 중 'We're late. Darling we're late.' 부분을 'It's late. Darling It's late.'로 바꿔 부른다. '우리가' 늦은게 아니라, '네가' 늦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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