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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May 12. 2022

우연에 상상을 더하면.

영화 「우연과 상상」


우연(偶然)

 :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친한 친구의 소개팅남이 전 남친이거나, 메일 주소를 입력하려는 순간 하필 남편과 딸이 집에 도착해 e 대신 a가 들어간 비슷한 이름을 외친다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나치다 동창을 만나는 우연.


얼마나 많은 우연들이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걸까.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 된다는 말처럼 알게 모르게 겹쳐진 우연들로 인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필연이, 선택의 결과가, 더 나아가 운명이라 믿고 있는 모든 일들이 우연으로 점철된 결과라면 어떨까.


수많은 정자 중 하나가 난자와 만나 수정되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순간조차 우연일진대, 그 어떤 것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입장에서 유독 크게 느껴지는 우연만이 '우연'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신비한 존재로 칭송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이라는 것이 일상 속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그 우연들이 꼭 좋은 결과만을 낳는 일이 아님을 말한다. 극단적인 순간을 우연으로 회귀시켜 선택의 핑곗거리나 결과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우연의 탓이라 여기며.


우연히, 우연하게, 우연하게도, 우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마주한 것일 뿐이다.



상상(想像)

 :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


친구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전 남친과 다시 시작하고자 폭탄 발언을 터뜨려볼까, 그 교수만 아니었다면 TV에서 기사를 읽고 있는 저 남자는 나였을 텐데, 눈앞에 있는 네가 진짜 내 동창이라면 준비했던 말을 꺼낼 수 있겠지.


알아채지 못할 우연들 사이사이에 상상을 더해본다. 우리는 종종 어떤 상황에 놓여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여러 경우의 수를 상상해 본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결과는 어떨까,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의도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상상은 비록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이 주최가 되는 행위이므로 우연보다 확실성을 가진다. 상상한 결과가 현실에 나타나면 그 실체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들이 만들어낸 현실 속에 상상을 가미함으로써 짧은 순간 여러 가지 결과와 소소한 반전을 만들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깜찍한 상상 탓에 심각하고 어색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상상한, 상상된, 상상적인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나의 반응 또한 그 상상과 일치할까.





웃음.

 : 웃는 일. 또는 그런 소리나 표정.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관객은 우연과 상상이 만들어낸 3개의 에피소드를 지나는 내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진지한 얼굴과 태도로 이렇듯 폭소를 자아낼 수 있는 능력마저 가진 감독이었던가.


감독은 드러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지나가듯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와 단어들로 웃음을 유발한다. 심지어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속에 비치는 감독의 태도는 한없이 진지하기만 하다. 이것이 하마구치 류스케식 개그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가장 생각나는 장면을 언급해 보자면,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그동안 자신을 유혹한 여자가 없었다던 세가와 교수는, 나오가 유혹했던 시간을 무서웠다 표현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번'에서는 나츠코와 아야가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아야가 급 존댓말을 하다 다시 반말로 돌아간다. (일본어 실력이 더 좋았다면 많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에티켓을 지키기 위해 웃음 참아 보았지만, 결국 관객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킬킬거리고 말았다. 다시 보며 마음껏 웃고 싶다.



+ 홍상수, 장률, 하마구치 류스케?


(‘해피 아워’에서의 대사를 빌려와 이야기하자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들에는 감정을 꾹꾹 누르듯(혹은 감정이 없는 듯) 이야기하는 말투의 여자 인물들이 꼭 한 명씩 있다. ‘아사코’의 아사코, ‘해피 아워’의 코즈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미사키, ‘우연과 상상’의 메이코, 감독의 취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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