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a Jun 15. 2022

흑백의 도시를 떠다니는 공허와 사랑, 그 어디쯤.

영화 「파리, 13구」



미장센.


마치 사진전을 관람하고 나온 기분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파리 도심 곳곳의 일상을 흑백으로 담아낸다. 장면을 하나씩 떼어내어 사진 한 장을 완성하고, 장면으로 만들어낸 그 사진들을 전시하면 이 영화가 완성된다. 사진의 연속이 곧 영상이지만, 이 영화는 유독 사진 여러 장을 겹쳐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파리를 비추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이다.


영상으로 담긴 흑백의 파리는 공허와 낭만이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공허한 마음으로 보면 한없이 공허해 보이다가도, 배경에 깔리는 경쾌한 음악을 따라 눈을 돌리면 또 낭만으로 가득해 보인다. 흑백으로 보아도 다양한 매력을 가진 도시 파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흑백이라는 선택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도전이지만, 잘 활용하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영화가 흑백을 선택한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모든 '색'을 지우고 바라보는 화면은 모든 편견을 묻어버리는 것만 같다. 예외적으로 앰버 스위트가 등장하는 장면만 컬러를 넣은 것은 그녀의 직업과 삶,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감독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허.


각 나라의 대도시는 각각의 특색을 가지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 속 사람들의 공허함이 그대로 드러난 시멘트 빌딩 숲과 좁아진 하늘 탓에 공통적으로 삭막하고 외로운 느낌을 준다. 도심 속에서 쳇바퀴 돌듯 바쁜 하루를 보내는 1인 가구의 젊은이들, 은퇴 후 할 일이 없어지거나 질환으로 인해 거동이 어려워진 노인들,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슴 한 켠에 공허를 안고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공허한 마음을 채워보려 각자의 방식을 찾아 헤맨다. 관계에 어설픈 에밀리는 데이트 앱을 통해 일회성 만남을 이어가고, 포르노 배우로 오해받아 뒤늦게 용기 내어 입학한 대학교를 포기하고 다시 일을 시작한 노라는 애인과의 장거리 연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지만, 되려 서로를 채워줄 수 없는 더 큰 공허함을 느낀다. '엔조이'라며 에밀리를 밀어내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던 카미유는 노라를 성녀에 비유하며 특별한 사람이라 여기지만 결국 사랑이 아님을 깨닫고 에밀리에게 돌아가며, 앰버 스위트는 일상 속 모습으로 화면 밖으로 나와 노라를 만난다.



공허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돌이켜보면 학생 때부터 도시로 나와 오랜 기간 홀로 살이를 했던 내 가슴속에도 공허가 분명 자리해 왔다. 온전하게 혼자였던 때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에도 크고 작은 공허는 항상 함께였던 것 같다.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이 떠나갔을 때, 애증 하는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외톨이가 된 기분일 때, 당장 만나고픈 친구와 만나지 못할 때, 사람들에 의해 스트레스가 쌓일 때. 조그마한 틈을 내보이면 놓치지 않고 공허가 비집고 들어오려 했고, 자리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챙겨 보고, 소개팅을 나가보고, 무리해서 친구를 보러 가고, 맛있는 것을 사 먹거나 쇼핑을 해보고, 홀로 여행도 떠나보고, 공부를 핑계로 스터디나 영어회화 모임 등에 가입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찾아보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 그네도 타보고(아이들이 오면 비켜줘야 해서 늘 마음 졸이며 탔다), 급작스럽게 직장을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나 유학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보고, 안 해보던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산책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운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악기를 배워보고, 직업을 바꾸겠다며 꽃을 배워보고, 각종 문화 공연 전시를 섭렵해보고.


빈자리를 공허로 채우지 않기 위해, 침범한 공허를 최대한 건강한 방법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성격 덕분일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공허에 파묻히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진 적은 없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마음에서 차지하는 공허의 면적은 더 넓어져 가는 것만 같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행복하게 웃고 있다가도 문득, 그렇게 찰나의 순간 공허가 스친다. 최근 읽고 있는 김영하 작가님의 '작별 인사'의 주된 주제는 '인공지능 휴머노이드에게 '마음'과 '윤리'를 적용할 수 있는가'인데, 이런 내용이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취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인가.」


「우울감도 인간에게 유익한 뭔가를 하는 게 아닐까. 만약 이게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거라면 왜 진화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았느냐.」


「휴머노이드의 최종적인 진화가 결국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면,  육신의 고통과 공허 같은 인간의 취약점까지 닮아야 하는 것일까?」


우울과 공허는 사실상 모든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인간의 감정은 '(인간들 기준상의) 언어'로 표현되며,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이유로 강조되며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만 같다. 영화 '파리, 13구'는 부유하는 이런 감정들을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 포인트다.



인종과 젠더.


영화는 인종과 젠더를 섞고, 흑백을 택함으로써 어떠한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모습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언어와 성별로 나뉠 수밖에 없는 한계는 분명 있다.


인종차별주의는 어이없고 황당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하필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중국계라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그리 달갑지 않다. 가족을 우선 시 하는 동양의 공통적 문화가 비칠 때마다 답답했고, 중국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매우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에게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집세 걱정 없이 룸메이트를 들여 생활비에 보태며, 데이트 어플로 일회성 만남을 이어가는 중국계 여자에게 그 어떤 감정도 동요하지 않았다. 하필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하필 중국이어야 했을까. 다른 나라 언어를 사용했다면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었을까. 중국 차별 주의가 있어 죄송하다.



젠더. 두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왜 사랑에 매달리고 아쉬워하는 쪽은 언제나 여자로 비치는 걸까. '사랑'과 연애에 목매지 않고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남자 쪽으로 그려진다. 이제는 너무 흔한 소재가 되어 버린 퀴어에 관한 암시 또한 새롭게 다가오지 못한다. 젠더를 뛰어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은 틀 안에 갇혀버린 느낌이 진하다.



좋은 음악과 멋진 촬영으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미장센을 가졌지만, 진정으로 공감하기에는 어려워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 배우 노에미 메를랑의 연기는 무척이나 발전했다.



작가의 이전글 12주간의 해프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