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나는 그제서야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해
창가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면
버려야 할 마음의 짐 잔뜩 동여 메고
우산을 집어 들며 대문을 열고 나선다
우산 펼치는 소리에 짐 하나 툭 털어내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툭 하나 더 덜어내고
비가 오면 꼭 슬리퍼를 신어야 한다 그래야
젖은 맨발 끝으로 흘려보낼 수 있을 테니
나의 이야기를, 밟은 땅이 제 것인 양 가져간다
우산을 쓰고 걷다 보면 이야기는 사라지고
나는 가벼워진다 가벼워서 걸음이 빨라지고
하지만
어디로도 갈 곳이 없어 보폭은 좁아지고
주위만 빙빙 돌며 맴돌고 있는 나
어디든 갈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지만
갈 곳이 없어
우산을 접고 그 속에 나를 둔다
또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펼쳐 꺼내 줄 것이다
마치 새로운 날이 찾아왔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