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은 독일의 소설가로 1917년 12월 21일 목공예에 조예가 깊은 가문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1985년 7월 16일 동맥경화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청소년기에 나치당이 조직한 청소년 단체인 히틀러 유겐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뚝심이 있었던 뵐. 이후 그는 서점의 견습공으로 일했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됩니다. 프랑스,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복무하고 포로로 잡히기까지 한 하인리히 뵐은 이후 귀향하여 전쟁 당시 겪었던 일에 대해 쓰기 시작합니다.
1949년 병사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열차는 정확했다>를 시작으로 참혹한 전쟁의 실태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1951년 한스 베르너 리히터가 이끈 독일어권 작가들의 문학 집단인 47그룹에서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1953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비평가와 독자 모두에게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계속해서 집필을 했으며 1967년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합니다.
1933년부터 시작된 히틀러의 독재 아래에서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깨달았습니다. 그는 히틀러를 위해 죽을 수 없다며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몇 차례나 탈영을 시도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고, 그것은 그에게 훗날 평화주의와 환경운동, 인권 문제에 대한 글을 쓰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글로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물질주의를 비판했고 도덕성 결여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1971년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그린 <여인의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이 43년만이었습니다.
이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로 베스트셀러가 되며 영화화로 이어져 그의 많은 작품이 크게 흥행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문학뿐 아니라 행동으로 나은 사회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청원한 적도 있던 그는 녹색당(녹색 정치를 이념으로 삼는 정당을 통칭하는 말로 주로 기후정의, 사회 정의, 생태주의 인권, 비폭력 같은 진보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이다)을 창당하는데 적극 참여했으며 서독에 미사일 배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는 모두가 고결하다는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미쳤고 독재에 저항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1985년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퀼른 문학상’을 ‘하인리히 뵐 문학상’으로 개칭하였고 1996년에는 독일 녹색당이 그를 기리기 위해 환경 정책을 연구하며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을 설립하게 됩니다.
독일 문학의 양심이라 불리던 그의 대표작으로는 <열차는 정확했다, 1947>,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53>, <9시 반의 당구, 1959>, <여인의 군상, 1971>,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974>가 있습니다.
블로르나 부부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카타리나 블룸. 어느 날, 그녀는 마을의 축제인 카니발 기간 중 있던 댄스파티에서 한 남성을 만납니다. 첫눈에 보자마자 그와 사랑에 빠진 카타리나는 세 시간 동안 그 남성과만 춤을 췄고, 이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꿈같은 밤을 보내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사라진 남성.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습니다. 이후 남자의 정체가 수배 중인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녀는 경찰 조사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수사과정 중 이야기한 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론에 모두 공개되며 무자비한 공격과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그녀. 그녀의 명예는 하루아침에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합니다.
언론은 어떻게 이토록 한 사람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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