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엄마표 콩나물국
맛은 그리움으로 남아 옛 향기를 불러온다
시간의 향기는 맛으로도 남는다. 그래서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생의 어느 순간을 포를 뜨듯 옮겨오기도 한다.
더욱이 추억이 어린 맛은 맵거나 아리거나 짭조름하거나 시큰하거나 달짝지근하거나, 두둥 북을 울리며 온몸의 감각을 일깨워 일제히 시간을 되짚어 달리게 한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들썩이며 타임머신이 작동된다.
유달리 옛맛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몰랐던 부추 맛도 알아버린 게 요즘이고 어릴적 그토록 싫었던 파도 이제는 그 향이 너무 좋아졌다. 가끔 먹던 파국마저 그립다. 아마도
나이 탓일 게다. 그래서 요즘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 그 시절의 맛을 재현하려 시도하고 있는데
영 제맛이 나지 않고 실패해버리고 마는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콩나물국이다. 항상 그 맛이 아닌 이유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다가 결국은 솜씨 탓이려니 포기했는데.
올여름 쉴 새 없는 냉방에 노출되어서인지 더위에 지고만 패잔병처럼 축 늘어지고 목이 깔깔한 게 영 불편한 게 아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버린 게 틀림없다. 이 묵직하게 막혀버린 목구멍을 뚫기에는 얼큰한 콩나물 국이 제격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향수가 자극되니 식욕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어린 시절, 감기에 걸리면 엄마는 꼭 콩나물국을 끓였다. 지금이야 조금만 이상 있어도 병원 행이지만 그땐 감기엔 그냥 콩나물국이 처치법이었다. 고춧가루를 풀고 대파를 숭숭 썰어 넣은 콩나물 국을 앞으로 밀어주며 목을 지지라고 했던 엄마의 말. 따끈한 아랫목에 허리나 엉덩이만 지지는 줄 알았는데 목도 지진다는 표현에 대해 속으로 방점을 찍은 채 골몰하곤 했다. 국물을 떠넘기며 막연히 수긍했다, 뜨겁고 얼큰한 국물로 목을 지진다는 것의 적합함에 대해서.
그 옛날 콩나물국은 소금 간에 고춧가루를 푼 이외에는 별다르게 첨가한 것 없는데도 국물맛이 얼큰하고 시원했다. 뜨끈한 국물을 목으로 넘기다보면 온 몸이 따스해지고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솟았다. 끝내는 밥을 말아 고소하고 아삭한 식감의 콩나물을 씹어 국물과 함께 한그릇 후르륵 비워내면 어느새 목은 부드럽고 말랑하게 변해있었다. 옆에서 엄마는 자꾸 국물을 떠 넘겨 목을 지져야 한다며 더 담아 주곤 했다. 한수저라도 더 떠먹여 막혀버린 목이 뻥 뚫려 감기가 달아나길 염원하는 마음이었으리라.
검은 옹기 시루에서 노랗게 자란 채로 300원 500 어치 담아 팔던 콩나물은 지금 마트에서 비닐봉지에 넣어 파는 콩나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콩의 품질부터 기르는 과정 그리고 손맛, 입맛의 변천까지 포함하여 그 맛을 돌이킬 수 없기에 지금은 그리움으로 남은 맛이지만 그 맛을 캐기 위해 가끔은 콩나물을 사고 국을 끓이고 무침을 한다. 오늘처럼 오랜 냉방에 목이 깔깔하고 아플 때면 고춧가루를 풀고 마늘, 대파 송송 썰어 넣은 콩나물국이 더 그리워짐은 말할 것도 없디.
흔한 한 그릇의 콩나물국이지만 그 시절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음식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것
을 보면 내 몸에 감각적으로 새겨진 아픔과 또 그 아픔을 어루만진 엄마의 손길 그리고 결국 그 정성이 한 그릇의 콩나물국을 통해 어린 자식을 치유케 했다는 사실적 경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요즘 에어컨에 의존하다 보니
코가 맹맹하고 목이 깔깔한 게 아프다. 병원 가는 일에 인색하다 보니 방법을 찾다가 칼칼한 엄마표 콩나물국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향수에 젖어 콩나물국의 옛맛을 재현해 보기로 한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식품대에서 집어 든 콩나물 이름이 '옛날 콩나물'이다. 신토불이 맛을 위해 국산콩임을 필수적으로 확인한다.
깨끗이 씻어 나와 더 꼼꼼히 씻을 필요도 없는 콩나물을 씻어 채에 받친다. 예전엔 식품의 환경 자체가 자연 그대로였지만 지금은 친환경 인증을 받아야만 인정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옛날 언젠가 언니가 콩나물을 마당 수돗가에서 씻다가 비명을 질러 가보니 지렁이가 나왔다고 했다. 지금에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일을 들어 열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반증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시 콩나물국 끓이기로 돌아와서, 깊은 국물 맛을 위해 멸치, 다시마 육수를 내고 끓여 국물이 우러나면 건더기를 건져내고 콩나물을 넣는다. 뚜껑을 열고 끓여야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고춧가루를 풀고 마늘을 다져 넣는다. 얼큰함을 배가시키기 위해 청양고추도 썰어 넣고 파를 송송 썰어 넣는다. 한소끔 끓어오르면 불을 끈다. 밥 한 그릇과 총각무김치를 내고 엄마 손처럼 정이 넘치도록 국을 그릇에 담는다. 살인적인 더위인 만큼 에어컨을 가동한 상태에서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후~ 불어 입에 넣고 목을 적신다. '목을 지져야 해' 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목이 좀 부드러워졌나~~
그런데, 칼칼하고 시원한 콩나물국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웠건만 2% 부족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