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플 마인드 A Beautiful Mind를 보고)
오래된 영화에서는 메아리가 울린다. 전개 또한 땅거미가 밀려오듯이 그림자 드리우며 흘러간다. 화면에 몰입되고 그 사이로 여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퍼져나간다. 소중히 간직한 낡은 책을 조심스레 집어 드는 것처럼 옛 것의 이미지가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다. 어디선가 묵은 것에서 나는 내음도 스멀스멀 스며든다. 아마도 영화가 그리워서 다시 눈에 담을 때 감정이 넘쳐서 그러는지 선입감으로 감정이입이 앞서면서 가슴이 울림을 전하느라 뇌에서 그렇게 읽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시 감상할 때에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눈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오감으로 바라보려는 욕심이 있다. 클로즈업되는 인물의 미묘한 표정을 살피고 창에서 비스듬히 사선으로 꽂히는 빛을 음미하고 장면을 전체적으로 눈에 담아보는 등 못 보고 지나친 여러 가지를 보려고 한다.
론 하워드가 감독한 2001년 작품 《뷰티블 마인드》는 실존인물인 정신분열증을 앓는 천재의 삶을 다뤘다.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허상과 불안사이를 오가며 산다. 수학과 경제학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룩하고 게임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존 내쉬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1940년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한 천재가 캠퍼스를 들썩거리게 한다. 내성적이며 괴팍해 보이는 수학과 새내기 존 내쉬이다. 그는 유리창을 노트 삼아 문제와 씨름한다. 수학자는 수학이 즐겁고 수학적 진리가 궁금해서 수학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데 천재성이 있어야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존 내쉬는 전형적인 수학자다. 수학의 여러 영역에 걸친 난제들을 불가사의한 집착력과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천재성이 있었다. 어느 날 파티에서 금발 미녀를 둘러싸고 벌이는 친구들의 경쟁을 지켜보다가 섬광 같은 직관으로 균형이론의 단서를 발견한다. 27쪽 짜리 논문을 발표한 20살의 청년 존 내쉬는 하루아침에 학계의 스타로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떠오른다.
MIT 교수로 탄탄대로이던 그는 정부 비밀요원 윌리암 파처를 만나 소련의 암호해독 프로젝트에 비밀리에 투입된다. 그 사이 자신의 수업을 듣던 물리학도 알리샤(제니퍼 코넬리)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한다. 알리샤와의 결혼 후에도 존은 파처와의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한다. 하지만 점점 소련 스파이가 자신을 미행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다. 허상의 조종으로 아기가 위험에 처하고 아내는 그를 떠나려 한다. 그 때 자신을 조종한 마시의 키가 자라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낸다. 찰스와 마시, 파처가 환상 속의 인물임을 깨닫고는 차를 몰고 떠나는 아내를 붙들면서 자신의 병을 인정한다.
그때부터 허상과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정신의 그 어떤 것이 그들을 존재케 했을까. 어느 정신과의사는 정신분열증은 힘든 현실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너무 힘들어서 도피하고자하는 심리와 현실의 대면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존 내쉬는 그들을 애써 외면하지만 그림자같이 늘 따라다니는 그 불안 속에서 견디어 내야한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은 야망의 하녀라고도 정의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현대인은 전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며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 속에 있다고 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을 떨쳐내야 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내일도 그 허상들이 보일 것을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야 하는 그런 것들은 어떤 기대와 욕망의 대체적인 불안일까. 존 내쉬는 허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허상인 것을 알지만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로지 외면하면서 끊임없이 학업에 몰두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수학계의 혜성으로 불리며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35년 동안이나 환각과 환청의 고통 속에서 살았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배회하는 유령으로 불렸다. 대학에서 아내 알리샤(제니퍼 코넬리)를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다. 헌신적인 아내의 도움으로 정신적 장애를 이겨낸다. 몇 십 년의 힘들었던 시간을 가족의 사랑과 수학으로 이겨내면서 자신에게 닥쳤던 비극을 극복한다.
도서관에서 그의 책상 앞에 만년필을 놓고 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고통 속에서 빛이 들어옴이 느껴졌다. 최상의 존경을 받는 모습에서 뷰티플 마인드가 빛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펜의 위대함이 그곳에 있었다. 불안과 고통 속에서의 성취가, 나란히 놓이는 만년필들의 이미지로 대체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심적 고통에 공감되기도 하고 허상에 휘둘리는 주인공 존 내쉬(러셀 크로우)의 갈등에 빠져들기도 했다.
엔딩 후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인간은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거였다. 실존 인물을 영화화했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느껴진 것도 있다. 정신적인 불안과 허상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회오리바람과도 같이 가슴을 몰아쳤다. 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영화 한편에 담았다. 아름다운 정신을 그려낸 아름다운 영화였다. 러셀 크로우의 내면 연기는 몰입도를 배가시켰다. 처음 그를 대면한 영화는 《글래디에이터》이다. 거기서 강인한 처절함으로 압도당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심장을 죄여오는 긴장과 불안감으로 휘청거렸다.
실존 인물인 수학자 존 내쉬(John Forbes Nash, Jr.)는 게임 이론(Nash's theories)을 수학적으로 접근시켰다. 세계 무역 협상, 국가노동관계, 20세기 경제학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생물 진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서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천재를 지켜낸 한 여인의 사랑이 있었으니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