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 가장 오래 하고 있는
내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위한 밥상에 정성을 기울일 수 있을까. 언제까지 제철 재료를 찾고 신선한 야채와 고기를 사서 가족들을 위한 밥상을 차릴 수 있을까. 좋은 재료를 구하고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레시피를 고민하고, 너무 짜지도 달지도 않지만 입맛에 맞게, 조리 과정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맛은 늘 색다르게 해서 먹는 재미를 줄 수 있도록 고민하는 일 말이다.
끝까지 하지 못할 거면 시작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오던 날들. 일종의 강박이었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면,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마음. 시작했다가 중단해 버리는 좌절감도 싫고, 제대로 해내지 못해 꺾여버릴 나 자신을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위한 밥상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끝까지 하지 못할지라도 지금 순간에 충실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식사 준비를 하는 그 짧은 시간조차 엄마를 내버려 두지 못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예쁘진 않지만 직접 만든 하루 세끼 말이다.
에릭슨은 24세부터 65세 까지를 묶어 장년기라고 칭했다. 학교 때도 이 긴 시기를 한큐에 묶어버리다니 성의 없다 생각했는데, 그는 반드시 중간에 육아기라는 챕터를 넣어야 했다. 청년기가 먹는 거 외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 먹지 않아도 신나는 시기였다면, 이후에 찾아온 육아기에선 먹고 먹이고 나면 하루가 끝나 나라는 존재가 끼어들 틈조차 없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내가 서 있는 3평짜리 주방이 감옥같이 느껴진다.
내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위한 밥상에 정성을 기울일 수 있을까. 아이들의 밥을 만들 때마다 여전히 하고 있는 질문이다. 언젠가 우리 집도 시간에 쫓겨 우유에 시리얼만 겨우 먹고 나서는 집이 될 것이고, 나도 아이들 키우는 일에만 몰입하는 육아기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오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아이들에게 엄마 냄새가 가득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비록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창살 없는 감옥처럼 갑갑하게 느껴지더라도 연신 "맛있다!" 를 외치며 오물오물 먹는 아이들을 볼 때면 3평짜리 작은 부엌은 나 홀로 서있는 감옥이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한 천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