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삶 - 22
대화가 필요해 feat. 요즘 것들
얼마 전까지 나한테 운동을 배우던 초등학교 6학년 짜리 남자아이가 있었다.
운동을 와서 꼭 나랑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그날 있었던, 혹은 운동 오기 전까지의 일상들을 이야기해 주는데 한번에 알아들은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정리를 해야 되는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집중이 심각하게 분산되어 말하다 말고 휴대폰을 보고, 게임을 하다가도 수십 번씩 매체를 바꾼다. 겨우 다시 대화를 시도하면 겨우 알아듣게 되더라도 충격적인 어휘 선택의 연속이다. 어쩌다 그 아이가 친구들과 나눈 카톡 내용을 보거나 게임 상 유저들과 나누는 대화를 볼 때면 내 도덕 관념의 근간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러니 직업적 윤리 의식이 발동했다. 운동은 곧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위한 행위라는 나의 철학에 의거하여 이 친구를 훈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분히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이 친구의 순진하고 똘망한 눈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뭐 하긴 나 초딩때도 엉망진창이긴 했다
며칠 전에는 친구들과 자리를 하다가 챗gpt 이야기가 나왔다.
엄청나게 방대한 량의 데이터를 특정 패턴에 맞춰 변경을 해야 하는 귀찮은 작업이 주어졌는데 챗gpt가 단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 일을 마쳐주어 자기도 모르게 감사 인사를 할뻔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얼마 전 인스타를 둘러보다가 챗gpt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데 이해를 하지 못하자 '아니 xx 같은 x아 그게 아니지'라는 메시지에 개의치 않는 ai의 답변을 보고 웃었던 기억과 겹쳐 한동안 요즘 시대 현상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사할 일에 표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되고, 답답함을 분노로 표현하는 것은 웃긴 일이 되는 시대.
무척이나 꼰대스럽지만 격변의 시대에서 미래의 형태가 궁금해진다.
* 아 물론 저도 어느 정도의 블랙 유머는 유머 내에서 소비합니다. ship선비 아님.
나는 말보다 텍스트를 더 좋아한다. 성격이 급한 탓에 말실수를 하거나, 할 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 불편한 상황에서는 뜻하지 않게 감정이 섞이기라도 한다면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좀 더 시간을 갖고 고민하여 명료하게 내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텍스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말 그대로 수단일 뿐, 매체인 communication의 본질을 대체할 수 없다. 존재를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이 필요하고, 소통의 본질은 말이다.
요즘처럼 말 한마디 안 하고 살기 좋은 때가 없었다.
카톡, 인스타, 페북, 등 sns의 메시지만 가지고 모든 소통이 가능하며 생존은 물론 생활을 넘어 사치 행위마저 몇 번의 터치로 해결되니 우리 삶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존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대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언론사를 비롯한 여러 대중 매체 그리고 sns에서 양산되는 자극적인 컨텐츠들에 의해 우리의 불안심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각자가 살아내는 것을 넘어 잘 살지 못하면 패배자가 된다는 불안심리에 사로 잡힌다. 그러니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보이거나, 빌런으로 보이니 더욱 대화를 단절한다. 문득 내가 도덕과 윤리 시간에 배웠던 '정다운 이웃'의 개념이 요즘의 교과서 책에도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
고등 교과 과정에 존재하여 학습했던 내 세대마저도 현시대의 기조에 의해 더없이 심각한 개인주의자가 되어가는 이 판국에, 요즘 시대에 성장하는 신세대에게 과연 대화의 가치는 어떤 모양일까. 올바른 형태의 대화를 학습하는 것은 인간으로 존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가치인데 대화를 가르치는 곳은 존재하는가. 올바른 대화 방법을 터득하기도 전에 매체에 노출되는 요즘 시대에서, 도덕과 윤리를 학습한 우리들마저 대화의 본질을 잊어 매체 속 개싸움에 동화되는 이때에 신세대는 안전한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니 말 그대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한다.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해서는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신 세대의 걱정 이전에 나부터 대화의 본질에 더 집중하는 30대로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