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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Aug 21. 2022

이문열 <삼국지>의 이중잣대

걷기 운동을 하면서 이문열의 <삼국지>를 듣는다. 나이 60이 넘어서야 제대로 된 <삼국지>를 접하면서 그 명성 때문에 기대가 컸지만 사실 실망뿐이다. "그때 갑자기 우렁찬 함성과 함께 산 위에서 일군의 병마가..." 이런 류의 묘사가 현재 10권 중 3권을 듣고 있는데 족히 수십 번은 반복되는 듯하다. 권력욕, 배반, 음모가 지겹도록 반복된다.


그런데 나를 진짜 실망시키는 것은 이문열의 사족이다. 이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번역한 것인데 나관중이 묘사한 역사적 사실 전개와 나관중 자신이 덧붙인 해설적인 내용이 있고 여기에 다시 이문열이 종종 사족을 붙이곤 한다. 이문열의 사족을 거칠게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유비도 결국 조조나 다름없는 야심가이다. 조조는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는데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하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리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이 그러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종 그 도를 넘어선다. 조조를 띄우기 위해 하는 짓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무슨 조조 밑에서 간신들이 하는 짓거리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이문열이 익히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부류 밑에서 놀던 습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의 예를 보자. 이문열은 조조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조카와 아들의 생명을 희생시킨 것을 대의를 위한 냉정한 판단이라고 한껏 치켜세운다. 좋다. 거기까지는 인정하자.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조조가 행군하는 병사들이 백성들의 밀밭은 손상시키지 못하도록 군령을 내렸으나 조조 자신의 군마가 갑자기 날아오른 비둘기에 놀라 요동치면서 밀밭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조는 자신의 군령을 자신에게도 적용한다면서 자신의 목을 베려고 했으나 부하들이 말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서 그에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 밀밭 사건은 그 자체로 조조의 엄격한 태도를 드러낸 미담에 해당한다. 그런데 조조가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려 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눈치챌만한 "쇼"다. 우리는 그것이 쇼이지만 그것 자체로 조조의 미담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문열은 이것이 쇼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이 밀밭 사건을 두고 후대에 누군가가 시를 지어서 조조의 그러한 쇼를 폭로했는데 이문열은 그 시를 지은 시인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아니, 그렇다면 그것이 쇼가 아니고 진짜 조조가 자신의 목을 베려고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앞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조카와 아들의 생명을 희생시킨 사건은 무엇이란 말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중잣대이다.


이에 한층 우스운 것은 조조의 부하 곽가가 조조를 원소와 비교하면서 조조의 위대함을 추켜세우는 10가지 조목이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상 지도자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라 할만하다. 조조 스스로도 그 말을 듣고는 좋으면서도 약간 쑥스러워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문열은 마치 이 10가지 조목의 조조 찬사가 마치 일체의 과장이나 거짓됨이 없는 것처럼 슬쩍 넘어가 버린다.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싶다.


유비와 조조의 권력을 향한 용트림을 동일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황제를 옆에 끼고 정사를 맘대로 주무른 동탁과 조조도 기실 같은 반열로 비교할 만하다. 그런데 동탁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비난 일색이다. 동탁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세력이 버틴 것으로 보아 동탁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조조와 달리 자신의 부귀영화에 너무 매달린 것은 더 큰 욕심(즉 스스로 천자가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탁은 가장 억울하게 취급된 인물이다. 동탁이 십상시를 친 후 조정의 백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황제 소제를 똑똑한 헌제로 갈아치운 것은 한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의 하나로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동탁과 조조의 차이라면 동탁은 좀 미련한 편이고 더 큰 야망이 부족했던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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