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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22. 2024

기미년의 태화관 현판을 발견하다(1)


  후암동은 서울역과 남산 사이에 있는 용산의 한 동네이다. 후암동 남쪽에는, 지금은 반환된, 용산 주한 미군 기지가 있다. 우리의 현대사 유적지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미군 기지가 있기 이전에 이곳은 일본군 주둔지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장까지 했던 니지시마 신조의 주택이 여기에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니시지마 신조는 이 집을 지월장이라 이름 붙였다. 주인 분의 증언에 따르면 주택의 입구 문 아치에 '지월장'이라는 한자가 적힌 타일이 박혀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토지가 쪼개지면서 집의 입구는 골목이 되어 버리고 타일 역시 사라져 버렸지만,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은 지월장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지월장은 1936년 일본이 남긴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은 경성의 항공사진을 <대경성부대관>이라는 지도로 남겨둔 바 있다. 이 지도의 PDF 본을 열어 먼저 일본군 주둔지를 찾은 후, 대각선 방향을 살펴보니 일제강점기 지월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각 지붕 형태의 다른 가옥들과 크기를 비교해 보면, 당시에도 이 집의 규모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었다. 위세 있던 인물이 살던 대규모 주택이라.



  순간, 거실에 놓여 있던 테이블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지월장의 주인 분은 해방 이후 불하받은 집의 거실에 걸려 있던 현판을 철제 틀을 짜고 유리판을 올려 테이블로 만든 것이라 했다. 어쩌면 이 현판도 니시지마 신조와 관련 있는 물건일 수 있었다.



현판에는 명월갱조태화정이라는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게 밝은 달이 비추는 태화정이라고 해서, 정자에 걸려 있던 현판이었나 봐."


  현판을 보며 주인 분은 내게 말씀하셨다. 마지막 글자는 '정자'를 뜻하는 한자였고, 정자에 밝은 달이 비춘다는 것은 으레 사용하는 표현이니 납득이 될 만한 해석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시'를 의미하는 '갱'이 왜 들어갔을지 하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명월갱조태화정이라는 일곱 글자를 검색했을 때, 태화정이라는 정자에 대해 나오는 정보는 없었다. 그 대신 '명월관'과 '태화관'이라는 단어가 함께 뜨곤 했다. 태화관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이다. 그렇다면 태화정이 혹시 태화관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일제강점기 신문들을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브에서 3·1 운동 관련한 자료들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1920년 9월 <동아일보>에는 3·1 운동 심문 내용이 실려 있었다. 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학생들을 선동해서 만세를 부르게 했는가 하고 물은 후, "명월관에서 선언서를 발표할 때에 탑골공원에는 수천의 학생이 모여 있다는데, 만일 관계가 없으면 무슨 연고로 모이였는가?"라고 되묻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곳은 태화관인데, 3·1운동이 일 년 지난 시점인 1920년 당시에 그곳을 '명월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태화관과 명월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실려 있었다. 당시 서울의 유명장소 100곳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가 연재되고 있었는데, 그때 인사동 태화관이 소개되어 있었다. 집의 유래를 설명하며 "이완용 후작이 이 집을 팔아 이 집이 요릿집이 되기 시작하여 태화관이 되었고 명월관 지점이 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여러 자료를 꿰어보다 보니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월장 현판의 일곱 글자, '명월갱조태화정'을 다시 살펴보자. '명월'은 밝은 달이 아니라 명월관을 의미하며, '태화정'은 '태화관'을 의미했다. 당대 유명 요릿집이었던,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명월관이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인사동에 태화관이라는 분점을 냈던 것이다. 그러니 요릿집 현판에는 명월관이 '다시 빛나는' 태화관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었다. '다시 갱'이라는 한자는 명월관과 태화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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