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디네이터가 아닌 생산자가 되고 싶어요.
첫 직장에 경력직으로 다시 입사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변 친구들은 내게 농담을 던졌다.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 역시 의아해했다. 왜 그 죽을 고생을 한 직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느냐고.
첫 직장은 업무강도가 살인적이었다. 매일 업무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 1~2시 퇴근이 일상이었다. 그때 우리 팀은 항상 신규 기획과 개발을 하며 일단위로 임원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보고 시간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오전 9시 또는 10시로 칼같이 고정됐다.
보고 후 일과 역시 비슷하게 흘러갔다. 오후 내내 마른걸레를 쥐어짜듯 아이디어 회의를 했고, 저녁을 먹고서야 힘겹게 나온 한두방울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개발에 들어갔다. 오전으로 보고 시간이 고정된 이유는 하루 8시간을 16시간처럼 쓰기 위한 임원 나름의 노하우였던 것이다.
퇴근길에 동기들과 “우린 정규직인데 맥도날드 알바보다도 시급이 낮다”며 웃픈 농담을 주고받았다. 결혼을 해보니 그때 가정이 있던 선배님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뒤도 안 보고 도망쳤을텐데 말이다.
실제로 입사 1년이 지났을 무렵 동기 두 명과 함께 단체 퇴사 선언을 하기도 했다. 세명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던 일이었지만 무자비한 업무량으로 인해 영혼 없는 노동이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다고 느끼던 무렵이었다. 퇴사하겠다는 신입사원들을 붙잡으며 회사에서는 특별히 연차를 쓰라고 했다. 웃픈 사실은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연차 쓰는 법을 몰랐다.
일에 치이고 상사에게 까이면서 실무자들끼리 진하게 소맥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일들이 잦아졌다. 아메리카노로도 정신이 들지 않을 때 커피믹스 그리고 핫식스 순으로 점점 더 강한 카페인에 기댔다. 고생을 고생대로 하니 젊은 나이에 자연스레 역류성 식도염까지 찾아왔다. 옆자리 선배는 회의시간에 자주 헛구역질을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살인적인 업무 강도의 이유가 단순히 반복되는 노동 때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개발자이자 컨설턴트로서 일했기 때문에 치열하게 머리를 쓰고,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다.
매달 임직원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줄만한 3~5분짜리 비즈니스 인사이트 영상을 2개씩 만들었다. 에어비앤비나 집카와 같은 공유경제도 저가 항공사의 대명사 라이언에어의 사례도 앞서서 공부했다. 주식이나 사뒀으면 좋았으련만 일에 치여 재테크 고민도 사치라 느끼던 시절이었다.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사원급에서 텅 빈 밤하늘에 내 맘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막내였지만 직접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름의 성취감과 보람을 참 많이 느꼈다. 수많은 책을 탐독하며 리더십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기도 했다. 심지어 뼛속까지 문돌이 였던 내가 600페이지가 넘는 코딩 책을 옆에 끼고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까지 개발하고 있었다.
이처럼 지식 생산자로서 일하는 것 외에도 내 주변엔 믿을 만한 동료와 선배들이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같이 고생도 하고, 굴곡진 시간을 겪어야 그만큼 깊어진다. 그때 동료들은 힘겨운 업무에도 함께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나름 명확했고, 그 속에서 각자가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통해, 선배들의 앞선 경험을 통해 배울 점도 참 많았다. 지나고 보니 그때 그 시절, 나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웠고, 성장할 수 있었다.
4년 차 즈음되었을 때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며 나는 자연스레 다른 직장을 알아봤고, 이직을 하게 됐다. 이직을 한 곳은 철저히 팀으로 일하던 곳과 정반대였다. 개인마다 업무 영역이 분명하게 나눠져 있었다.
각자의 성과로 철저하게 평가를 받았기에 초반 1~2년을 시스템에 적응하다 3년 차부터는 자리를 잡고, 높은 고과를 받으며 인정받았다. 높은 성과를 거둬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은 헛헛했다. 내 능력이 아닌 다른 사람의 능력을 활용해 성과를 거둬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타인 의존적인 업무구조는 알맹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내 의견보다는 기획안의 설득력을 높이고, 승인을 받기 위해서 키맨들을 찾아 그들의 의견을 수집해야만 했다. 업무 영역은 나날이 확장되고, 조직에서의 역할도 커져갔다. 하지만 나의 업무와 역할을 키운 8할은 사내 전문가,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들이었다.
직접 생산하는 능력보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실행하게 만드는 능력이 나날이 높아졌다. 그것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기획자로서의 역량이며, 나름의 창조지만 그 속의 알맹이들을 내가 컨트롤하기 어려웠다. 난 주요 의사결정권자들의 의견들을 모으고 종합하는 코디네이터에 가까웠다.
대학생 친구들과 멘토링 활동을 진행하며 이력을 소개하면 어김없이 물어온다.
“멘토님은 왜 첫 직장에 다시 돌아오셨나요?”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코디네이터가 아닌 생산자로 살고 싶었어요."
이직을 하고 4년을 앞만 보며 달린 후에야 나의 마음이 헛헛한 이유를 찾았다. 나는 철저하게 기획자였고, 코디네이터였기 때문이다. 한 번뿐인 인생 나의 생각과 온 마음을 담은 결과물들을 세상에 꾸준히 내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조금은 부족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회사에서도 나의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생산자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러 도서와 연구결과를 통해 얻은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교안을 만들고 사내 강의를 한다.
남의 생각과 남의 말을 재료 삼아 화려한 디즈니 성을 짓는 것보다 나만의 고민과 생각을 재료 삼아 작은 벽돌부터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다. 언젠간 내 손길이 안 닿은 곳 없이 지어진 멋진 벽돌집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한 번뿐인 인생, 나는 생산자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