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까지 해운대 숙소를 알아봤다. 다행히도 한글날 연휴여서 좋기는 했지만, 좋은 숙소는 이미 예약이 마감되었고, 예약이 가능한 숙소들은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흔하게 가던 국내 여행이었다면, 이쯤에서 여행지를 바꾸거나 일정을 바꿨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서 쓰기 시작한 소설은 어느새 3권의 책이 되어 거실 책장에 놓여 있다. 첫 소설은 지인들이 많이 사줘서 아주 잠깐 차트에 올라간 적이 있었고, 두 번째 소설은 나눔 도서로 선정되어서 2쇄를 찍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소설은 겁 없는 투고로 대형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되었고, 나름 좋은 평들을 받고 있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 세 번째 소설이 이번에 부산국제 영화제 스토리 마켓 한국 IP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다.
"말도 안 돼!"
인생을 살면서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들었던 대학로 무대의 마지막 공연. 아직도 현실 같지 않은 신혼여행. 그리고 세상의 전부인 우리 아이들의 태몽과 태어나는 순간들.
그리고 나에게는 쌤앤 파커스라는 출판사에서 처음 연락을 받았던 날도 그렇게 남아 있었다. 뭔가 인증을 받은 기분이었고, 나를 처음 발굴해 준 편집장님의 눈이 정확했다는 확인을 받는 순간이었다. 소설가라는 이름에 볼드가 되는 기분이었고, 어깨가 좀 넓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만큼이나 어제의 순간도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부산 국제 영화제라니.."
물론, 선정이 되었다고 해도 계약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겨우 무대에 올라갈 자격이 생겼을 뿐.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스토리를 가진 작품들 사이에서 다시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잔뜩 들떠서 부산에 꼭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기 때문에.
나는 한때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던 영화학도였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사람이었고, 결혼하기 전까지 2개의 영화관 브랜드의 VIP고객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보던 주말의 명화부터, 얼마 전에 온 가족이 다 같이 가서 본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나는 모든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보는 것을 너무 즐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에게 부산국제 영화제는 뭔가 꿈의 궁전 같은 곳이었다. (참가자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관람을 하러 가는 것 말고.) 항상 바라고는 있었지만,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고. 꿈을 접었던 기간 동안에는 정말 이제 남들의 세계라고 여기던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것이다. 그 꿈의 공간에 내 소설을 소개하는 부스가 생기고,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소개되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면 출판사와 그 제작사 담당자들이 미팅을 하고 내 이야기로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어떻게 내가 집에 있을 수 있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내 눈에. 내 휴대폰에 잔뜩 담아 와야 한다.
"좋은 일로 가는 데, 좋은 데 예약해."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내는 내 기분을 더 들뜨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나는 자재심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배우로 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메인이벤트도 아니고, 그저 영화제 기간에 같이 열리는 부가 이벤트에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하지만 상관없다. 그러라고 해라. 나에게는 메인이벤트보다 훨씬 큰 임팩트고 내 인생에 기똥찬 순간이니까.
계약이 되지 않아도. 내 삶이 전혀 변하지 않아도. 여전히 무명의 신인 소설가여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