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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Sep 21. 2021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개

하세 세이슈의 <소년과 개>(2021)

올해 3월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반려동물을 기른다고 한다. 동네 뒷산을 걸을 때마다 그 사실을 실감한다. 과장 조금 보태서 3분에 한 번은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과 마주치니까. 견종도 다양하다. 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로서는 '크네' 혹은 '작네' 정도 감상만 떠오르지만.


<소년과 개>를 읽기 시작한 것도 순전히 163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이력 때문이었다.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최애, 타오르다>와 비교하며 읽을 생각이었다.


목차는 단출하다. '남자와 개', '도둑과 개', '부부와 개', '매춘부와 개', '노인과 개', '소년과 개'라는 여섯 개 단편으로 구성된다. 개를 소재로 한 단편집처럼 보이지만, 두 번째 이야기인 '도둑과 개'로 접어들자마자 알 수 있다. 여기서 '개'는 동일인물, 아니 '다몬'이라는 이름의 동일견이라는 사실을. 그 다음부터는 거침없이 들판을 내달리는 개처럼,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속도가 붙는다.


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내가 다몬의 여정을 따라 울고 웃었다. '다몬 같은 개라면 나 정도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다몬에게서 위로를 얻고 싶다.' 동네 뒷산에서 마주친 개의 면면을 떠올렸다. 개를 산책시키던 사람들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다몬 같은 개라면'이라는 단서가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세 세이슈, <소년과 개>(손예리 옮김, 창심소, 2021)


소설은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나카가키 가즈마사는 편의점 앞에서 떠돌이 개를 발견한다. 목걸이에 적힌 이름은 다몬. 목돈을 벌기 위해 외국인 절도단의 운전사 노릇을 시작한 가즈마사는 다몬을 수호신으로 여기게 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도 다몬을 볼 때마다 소녀처럼 기뻐한다. 절도단의 일원인 미겔은 돈을 많이 줄 테니 다몬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지만, 정이 들어 차마 다몬을 보내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즈마사에게 날아든 의뢰. 절도단은 이번 일을 끝으로 센다이를 떠난다고 한다. 하지만 꼬리가 길었던 탓일까, 그들은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승합차를 들이받은 가즈마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미겔에게 끌려가는 다몬이었다.


이후 다몬은 도둑인 미겔, 나카야마 부부, 데이트 클럽에서 일하는 미와, 노인 야이치의 손을 거친다. 그들은 저마다 의미를 담아 다몬에게 클린트, 톰바, 레오, 노리쓰네 같은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여러 이름을 전전한 끝에 소년인 히카루를 만나고 나서야 원래 이름이자 마지막 이름인 '다몬'을 되찾는다.


<소년과 개> 자체는 옴니버스 소설이지만, 다몬 입장에서 보면 5년에 걸친 치열한 장편 모험기다. 다몬은 이와테에서 출발해 나가노, 교토 등을 거쳐 구마모토로 향한다. 작중 인물들은 '가족'을 찾으려는 다몬의 집념에 감탄한다. 여기서 아쉬운 점 하나. 다몬의 여정을 그린 지도를 부록으로 추가했더라면 우리나라 독자들도 작중 인물들의 감상에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근 읽은 책 중에서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은숙 옮김, 하다, 2017)가 독자를 배려한다고 느꼈다.


노리쓰네의 여정 도중에 인가(人家)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집에 온 것일까.
고독한 냄새, 죽음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야이치는 생각했다.
노리쓰네에게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p.262


가즈마사와 미겔은 다몬을 수호신으로 여기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머릿속에 의문 부호가 떠오른다. 다몬을 거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불행한 결말을 맞기 때문이다. ('불행하다'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리긴 좀 그렇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ㅠ)


그렇다면 다몬은 주인에게 불행을 떠안기는 저주 받은 개라는 건가. 다몬에게 '노리쓰네'라는 이름을 붙인 야이치는 다몬이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자신을 찾아온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일의 앞뒤 관계를 바꾼 것이다. 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사람들이 상처 입고 떠돌던 다몬을 거두어 집과 음식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묵묵히 곁을 지키는 다몬의 모습에서 위로를 얻는다.


주성치를 좋아해 그의 이름을 뒤집은 하세 세이슈(馳 星周)를 필명으로 삼았다는 작가는 바텐더, 서평가, 편집자를 거쳐 <불야성>으로 데뷔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그를 처음 접했지만, 그를 잘 아는 하드보일드 소설 마니아라면 <소년과 개>를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일 것이다. 사실 작가는 25년 이상 개와 함께 산 애견인이기도 하다. 반려견을 위해 도쿄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이사했을 정도라고. 그래서인지 <소년과 개>에서는 개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다몬을 불평 한번 없이 인간을 위해 헌신한다. 겁에 질려 크게 짖거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먹이를 달라며 보챌 법도 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라는 행동 양식만 입력된 것처럼.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다몬 같은 개라면 키워 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몬 같은 개'가 아니라면? 주인이 바쁜 건 아랑곳 않고 산책을 가자며 졸라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용변을 봐도, 커다란 곰에게서 주인을 지키지 못해도 모든 개는 사랑받아 마땅하다.


동물, 그중에서도 개가 갖는 치유의 힘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장점뿐인 영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의구심을 갖게 한다. 다몬의 여정은 분명 감동적이다. 사람들은 다몬 덕분에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다몬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랐을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개, 다몬의 모험기에서 빛난 것은 '일방적인 충성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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