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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Nov 29. 2021

실과 바늘로 그리는 그림

북바이니트 프로젝트 그 첫 번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뜨개질이 취미라고 하면 으레 '손재주가 좋은 모양'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럴 때마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린다. 겸손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뜨개질을 제외하면, 손으로 하는 일 대부분 평균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청소는 엉성하고, 음식은 밍밍하고, 글씨는 촌스럽다. 특히 그림은 눈 뜨고 못 볼 수준이다. 일곱살 때만 해도 미술학원에서 상을 곧잘 받았는데. 이후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일 뿐.


그림으로 먹고사는 동생을 보며 '어쩌면 나도?' 하는 마음에 드로잉 책을 사서 끼적여 봤지만, 내게는 재능도 흥미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 <케이토다마> 2020년 겨울호를 보다 '이거구나!' 싶었다.



일본 니트 디자이너 도카이 에리카의 컬러워크(배색뜨기) 작품이다. 도카이 에리카는 대바늘 배색뜨기 관련 책을 여러 권 선보였는데, 그중 <누구나 쉽게 따라 하는 니트 손뜨개>는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다. 하나같이 독특하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다. 특히 코뿔소 무늬 가디건과 백곰 풀오버가 인기다.


지금까지는 '배색뜨기' 하면 자잘한 무늬가 빼곡히 들어찬 페어 아일 정도만 떠올렸다. 하지만 도카이 에리카의 배색뜨기는 '실과 바늘로 그리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둘 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페어 아일도 언젠가 도전해 보고 싶은데).


무엇을 뜨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토트백의 가로세로 비율이 책 표지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 좋아하는 책 표지를 배색뜨기로 표현해 보자.'


곧바로 '좋아하는 책'을 찾아 책꽂이를 뒤졌다. 내 취향을 정립하는 데 영향을 미친 책이면서 표지가 아이코닉하면 좋겠다. 그때 눈에 띈 책이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었다.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츠즈키 쿄이치 지음, <권외편집자> p.33


(백 번씩이나 읽지는 않았지만….)


실은 '파인램스울'로 정했다. 색감이 빈티지하고, 색상이 다양하고, 로트 차이가 없어서 실이 다 떨어지면 언제든 다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오히려 실이 남아 재구매할 일은 없었지만.



우선 어떤 색 실이 필요한지 추린다. 너무 다양한 색을 써도 지저분해 보일 수 있으니, 적당히 데포르메. 위에서부터 703 연밤멜란지, 716 흰색, 741 검정색, 714 회색멜란지, 713 연회색멜란지, 704 갈색, 724 진보라멜란지다.


3.5mm 대바늘로 떴을 때 게이지는 11코 14단이 나왔다. 가로 22cm 세로 30cm 크기의 가방을 만들 예정이므로 엑셀에 50코 85단 도안을 그린다. 이때 셀 크기를 조절해 가로 세로 비율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코의 모양은 정사각형이 아니니까. 다음으로는 모눈 위에 책 표지 이미지를 얹고 투명도를 조절한다. 미농지를 깔고 그림을 따라 그릴 때를 떠올리며 셀을 하나씩 채우면 도안이 완성된다. 일러스트레이터나 여타 전문 프로그램도 있지만, 간단한 컬러워크라면 엑셀로 충분하다.



이제 도안을 따라 뜨는 일만 남았다. 도안을 원본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들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막상 떠 보니 만만하지 않았다. 실제로 뜨면서 느낀 점은 '새 실은 가급적 겉면(RS)에서 걸자'와 '가디건을 뜰 게 아니라면 원통뜨기가 낫다'는 것이었다. 색색의 실이 주렁주렁 늘어진 안면(WS)을 보고 있자니 벽지를 뜯어낸 콘크리트 벽과 마주하는 듯했다. 하지만 소분한 실타래들과 씨름하며 한줄 한줄 도안을 '그리는' 과정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세로 배색(인따르시아)에서는 양쪽 실을 꼬아가면서 떠야 한다. 그것도 몰라서 처음에는 편물 곳곳에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길게 빼 놓은 꼬리실을 돗바늘에 꿰어 마무리하자 말끔해졌다.



앞뒤판을 뜨고 스팀을 줬더니 훨씬 보기 좋아졌다. 뒤판은 책의 속표지를 참고해 심플하게 만들었다.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을 수놓을까 생각했지만, 일본어와 한자를 수놓을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어떻게 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가방을 매는 듯하다.


꽃송이는 프렌치 노트 스티치로 표현했다.


대바늘 가방은 무거운 물건을 넣었을 때 처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안 쓰는 티매트를 안감으로 재활용했다. 사실 안감 바느질이 배색뜨기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가방 끈은 유튜브 영상을 참고해서 만들었는데, 뜨는 데 시간이 걸리는 대신 거의 늘어나지 않아 가방 끈에 안성맞춤이다.



가을, 겨울 내내 들고 다니기 좋은 가방이다. 자석 단추를 달아 실용성을 한층 높였다. 다음에는 무엇을 떠 볼까. 동생이 그린 그림을 니트 웨어나 소품으로 구현해 엄마에게 선물로 드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이가 그린 낙서를 인형으로 만드는 것처럼.




실: 파인램스울 703 연밤멜란지, 716 흰색, 741 검정색, 714 회색멜란지, 713 연회색멜란지, 704 갈색, 724 진보라멜란지

바늘: 대바늘 3.5mm

도안: 자작(나쓰메 소세키 <마음(こころ)> 신초분코 판 표지 이미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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