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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Dec 14. 2021

n차원을 유영한다는 것

직역과 의역을 생각하다

번역서를 읽다 어색한 문장과 맞닥뜨린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말한다. “활자 그대로 직역해서 그래.” 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문장가로 알려진 작가의 글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이건 오역에 가까운 의역이야.” 문득 궁금해진다. 직역은 직무 태만이고, 의역은 근면 성실일까? 반대로 직역은 저자에 대한 존중이고, 의역은 번역가의 오지랖일까?


나더러 직역과 의역 중 하나만 고르라면 잠시 망설이다 '의역'을 택할 것이다. 직역을 무시해서도, 가독성을 추구해서도 아니다. 의역의 범위를 넓게 보기 때문이다.




'こころ(코코로)'라는 단어를 번역한다고 가정하자(일본어를 배운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단어를 굳이 번역씩이나 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테지만). 우선 가로로 선(x축)을 길게 그은 뒤 가운데를 원점으로 삼는다. 축 위에 점을 찍고 출발어, 즉 'こころ'를 적어 넣는다. 원점을 기준으로 대칭되는 지점에는 사전의 1번 의미가 실려 있다. 도착어가 한국어일 때, 답은 '마음'이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접었다 펴면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것처럼, 여기에는 어떤 가치 판단도 끼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こころ'에는 훨씬 많은 뜻이 있다. 생각, 기분, 느낌, 정성 등. 이 단어들은 '마음'이라는 점 주변에 흩어져 있다. 고유명사일 가능성은 없을까? 일본 문학을 다루는 글이라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번역을 하다가 'こころ'라는 단어와 마주쳤을 때 일말의 고민 없이 '마음'이라고 옮기는 것은 '활자 번역'이고, 문맥에 따라 사전의 여러 뜻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직역'이다.


여기에 세로축(y축)을 더한다. 세로축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저자의 언어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나이, 성별, 출신지, 성격 등)부터 문체의 특징, 시대상, 예상 독자까지…. 소설이라면 등장인물의 성격과 해당 인물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y축이라기보다는 'y축과 그 이하 축'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짧은 글을 옮기더라도 번역가는 부지런히 다양한 잣대를 꺼내고 집어넣기를 되풀이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예로 들어보자. 번역가는 '저자의 문학 세계'를 조사한 다음 소설 전문을 읽고 '맥락'을 파악한다. '예상 독자'는 《설국》이 일본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대강 꼽아도 세 개의 축이 더해진다. 시마무라, 고마코, 요코의 대사를 옮길 때는 각 '등장인물의 목소리'라는 축까지 더해 단어를 고르고 표현을 다듬어야 한다.


누가 썼는지 불분명하고 앞뒤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 사전 속 예문 같은 글이라면 '가독성' 하나만을 보며 직역해도 문제없다. 하지만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저자가 있고, 책을 더 많은 독자에게 선보이려 애쓰는 편집자가 있다면, 번역가는 의역의 세계로 발을 들일 수밖에 없다.


출판번역 수업 첫 번째 시간, 유인물을 받자마자 깜짝 놀란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수업을 듣기 전에 테스트 번역을 제출했는데, 수강생 열여섯 명의 번역문이 줄 맞춰 갈무리되어 있었다. 같은 글을 번역했지만 결과물은 전혀 같지 않았다. 열여섯 명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n개의 잣대를 갖다 댄 것이다.


번역가의 결과물은 네모난 면, 2차원 위에 펼쳐진다. 하지만 번역하는 동안 우리의 사고는 3차원, 아니 그 이상 무궁무진한 공간을 유영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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