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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Feb 08. 2022

안녕, 서울

회기동, 구로디지털단지, 화곡동, 그리고 경기도

전입신고를 마치고 ‘경기도’로 시작하는 주소 스티커를 받았다. 주민등록증 뒷면은 다른 주소 스티커로 빼곡했다. ‘이제 서울 사람이 아니구나.’ 대학교에 합격해 성큼 다가온 서울 살이에 들뜨던 십여 년 전처럼.




전세 만기를 앞두고 우리는 서울 지도를 펼쳤다. 나는 재택근무가 주인 프리랜서고, K는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한다. 굳이 서울 살이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집값 폭등, 서울 떠나는 2030’ 기사 속 두 사람일 뿐이다.


서울 살이를 회기동에서 시작했다. 회기동에서 구로디지털단지로, 구로디지털단지에서 화곡동으로. 점점 서쪽으로 가네. 농담 삼아 “이러다 인천 앞바다에 장판 깔고 살겠다”라고 했는데, 송도 아파트값을 보고는 내가 얼마나 경솔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발 뻗고 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투룸에서 투룸으로 이사하지만, 이사할 집의 구조가 비효율적이라 버려야 할 짐이 많았다.


“이건 언제 샀더라?”

“여기 이사 오면서.”

“이건?”

“그것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원룸에서 둘이 살 때는 대체 어떻게 살았던 걸까. “1평짜리 고시텔에서도 살았는데 뭘.” 맞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집이 열 배나 넓어졌으니 우리 성공했네, 너스레를 떨었다. “24평짜리 아파트는 휑해서 어떻게 사냐.” 슬쩍 웃고는 층간 소음 때문에 딱 한 번 쓴 스테퍼에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였다.



의외로 공동생활 체질?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서울에 덩그러니 떨어졌지만, 집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기숙사에 당첨되었으니까. 이층 침대 두 개, 책상, 옷장이 전부인 4인실이었다.


근처 마트에서 이불을 사고 오니 아랫층은 진작 주인이 정해졌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이층 침대가 로망이었던 내게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불편하기만 한 윗층을 쓰겠다고 자진해 봐야 어린아이처럼 보일 테니까.


화장실과 샤워실 모두 공용이었지만 워낙 무던한 성격이라 ‘화장실 청소 안 해도 되고 좋네.’ 정도로 생각했다. 룸메이트 역시 조용히 자기 할 일에 열심인 타입이었다. 외박할 일이 있으면 꼬박꼬박 외박계에 이름을 썼고, 외부인을 데려오는 일도 없었다. 힘들었던 점이라면, 동기 중 하나가 새벽 기도 때문에 수요일마다 새벽 3~4시에 알람을 맞춘 것? 그나마도 기억을 쥐어짜서 겨우 나온 고충이다.


하지만 온실 속 평화 같았던 기숙사 생활은 한 학기 만에 끝나고 말았다. 누구를 탓하랴, 원인은 내 성적인 것을. 기숙사 경쟁률이 이렇게나 세다니,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 현상을 몸소 느끼며 고시텔을 알아보러 다녔다.


첫 번째는 월 22만 원짜리 방. 화장실이 딸리지 않은 방이었지만, 기숙사 생활로 단련되어 있어 그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쭈뼛거리며 방문을 여는 고시텔 주인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순간, 부동산의 비읍자도 모르던 내 머릿속에도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방에 난 창문이라고는 복도로 난 것이 전부였다.


두 번째는 월 25만 원짜리 방. 반지하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큼직한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문 30초 컷이라는 경이로운 학주 근접은 덤. 서울의 햇볕, 3만 원에 이용 가능합니다.


회기동 고시텔.


(평면도는 기억에 의존해 그렸으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아니 사실과 다를 것이다)


책상 밑으로 침대가 반쯤 들어가는 구조였다. 부엌도 공용, 화장실도 공용. 부엌에는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꾹꾹 눌러 담은 밥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약속 없는 날이면 엄마가 보내준 콩자반 통조림에 공짜 밥을 곁들여 먹었다. 사실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았다.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아리방에서 시간을 죽이다 보면 식사 때가 지났으니까.


반지하 고시텔에서는 일 년 남짓 살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쾌적한 주거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억에 남는 일도, 방 안을 찍은 사진도 가장 많다. 친한 친구들은 측문으로 향하는 오르막을 오르다 내 방을 지나칠 때면 발치에 난 창문을 콩콩 두드렸다. 문앞에 놓아둔 구두에 꼽등이가 들어가 책으로 구두 입구를 막은 채 울면서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했다.


고시텔의 행인 정강이 뷰(...)


‘언젠가 더 넓은 집에서 살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부동산이나 인테리어 정보를 뒤진 적은 없었다. 동아리방이, 학교 매점 계산대가, 이름 대신 ‘근로장학생’이라는 팻말이 놓인 공제회 안내 데스크가, 기증 도서를 정리하는 도서관 3층 구석 창고가 모두 내 영역이었기에.



화장실에 두부를 쏟았다


졸업을 앞두고, 어디로 이사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졸업하는 마당에 굳이 집값이 비싼 대학가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신촌에서 회계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물가 사악하기로 유명한 신촌은 고려 대상에 넣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살아 본 곳이라고는 학교가 있는 회기동, 이모네 집에 잠깐 얹혀산 구의동이 전부였다. 어차피 몇 푼 안 되는 보증금 걸어 두고 월세 살이 할 터, 동네가 마음에 안 들면 용달차 불러 짐 싣고 훌쩍 떠나면 그만이다. 막말로 서울 지도를 펼쳐 놓고 동전을 던져도 상관없었다.


족쇄는 원치 않아도 무게추는 필요했다.


그때 무게추가 되어 준 사람이 K였다. K는 아르바이트로 지친 나를 배려해 매번 우리 학교 앞으로 찾아왔다. 가끔 당시 이야기를 하면 K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라며 웃어넘기지만.


월계동 원룸(부엌은 공용).


K의 수고를 덜고자 그가 사는 월계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청소할 화장실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물론 부엌은 공용이었다.


고시텔에서 살 때와 달리 조금씩 요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부엌을 오래 쓰기에는 눈치 보이는지라 간단한 찌개류가 고작이었지만. 그나마도 옆방 사람과 마주칠까 방 안에서 재료를 모두 손질한 다음 밖에 나가 냄비에 와르르 붓고 가스레인지만 쓰는 식이었다.


하루는 K와 같이 먹을 김치찌개를 끓였다. 평소처럼 책상 겸 밥상 겸 아일랜드로 쓰는 접이식 탁자에 도마를 놓고 두부를 썰기로 했다. 플라스틱 용기에 든 물은 화장실에 버리고. 나는 화장실 문턱에 쪼그려 앉아 두부 용기를 반쯤 기울였다. ‘조금만 더….’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무슨 대단한 요리를 만들겠다고 용을 썼는지. 중력을 이기지 못한 두부가 화장실 타일 위로 떨어졌다.


왈칵 치미는 감정은 짜증이 아닌, 슬픔이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밥을 짓다 말고 펑펑 우는 나를 K는 영문도 모른 채 위로했다. 그때 나는 ‘평균에 못 미치는 주거 환경’에서 산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했는지도 모른다.



중문이 없으면 생기는 일


서로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들 무렵,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1 더하기 1은 2지만 원룸 더하기 원룸이 투룸은 아니었다. 화이트 톤으로 꾸민 신혼집도, 으레 갖춰야 할 것만 같은 하이엔드 가전도 없었다. 이삿날 각자 밴을 불러 짐을 실은 다음, 같이 고른 원룸 앞에서 만났다.


방 하나,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 옵션은 싱글 침대부터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K의 모니터보다 작은)텔레비전까지…. 말 그대로 몸만 들어가면 됐다.


월계동 원룸.


얼핏 들으면 남부럽지 않은 신축 원룸 같지만, 이 집에는 딱 두 가지가 없었다. 바로 복도와 중문이다. 빌라 1층이었는데, 나머지 세대와 입구가 달라 현관문을 열면 곧바로 길이 나왔다. 골목길도 아니고 버젓이 차가 다니는 도로가.


과거를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나도, 집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K도 그 집을 떠올릴 때마다 “추웠다”라며 혀를 내두른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면 영등포에서부터 한 시간 넘게 따라온 고단함이 신발을 벗고 슬그머니 들어오는 듯했다.



하나씩 늘리기


K가 졸업하고, 우리는 구로디지털단지로 이사했다. 회사 선배가 괜찮다며 추천했는데, 집 계약을 하고 보니 선배 자취방 바로 앞 건물이었다. 이전 집과 마찬가지로 원룸이었지만, 이번에는 세 글자가 더 붙었다. 바로 ‘분리형’이다. 중문이 생긴 것이다.


구로디지털단지 분리형 원룸.


7평짜리 원룸에서도 1인 1책상은 포기할 수 없었다. 개인 공간의 최소 단위는 ‘책상’이 아닐까. 책이며 머그잔이며 내 물건을 펼쳐 놓은 책상 앞에 의자를 당겨 앉으면 내 세계에 몰두할 수 있다. 나머지 공간이야 어떻게 되든 좋다. 달리 말하면 책상 두 개 놓을 공간만 있다면 원룸에서 두 명이 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권장 사항은 아니지만). 잠자리는 접이식 매트리스로 때웠다.


고향 어른들에게는 ‘구로공단’으로 익숙한 구로디지털단지는 다시 경험할 일 없는 신기한 동네였다. 평일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다가도 주말만 되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적지 않은 식당이 일요일마다 문을 닫았다.


구로디지털단지에서 2년을 보내고, 슬슬 전셋집으로 가도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우리는 평소 궁금했으면서 집값이 비교적 합리적인 동네를 몇 군데 댔다. 여행을 가도 이보다 더 심사숙고할 것 같은데. “그래, 화곡동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잊은 지 오래다.


화곡동 투룸. 둘이서 책상 하나를 쓰기에는 좁다고 판단해 곧바로 책상을 더 주문했다.


이번에는 ‘방’이 하나 늘었다. 조그만 거실에 방 두 개, 화장실과 부엌. 10평이 조금 안 되었지만 구조가 효율적이라 평수보다 넓어 보였다. 큰 방에 침대와 텔레비전을 두고, 작은 방은 드레스룸 겸 창고로 썼다. 거실에는 폭 140cm짜리 책상을 두 개 놓았다.


화곡동은 구로디지털단지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냄새만 나면 참 좋을 텐데, 소리도 많이 났다. 오토바이가 밤낮으로 골목길을 드릉드릉 누비고(우리도 배달 음식을 자주 먹어서 할 말은 없다), 우리나라의 앞날이 걱정될 만큼 소방차와 구급차가 자주 다녔고(역세권의 숙명이거니), 연말이 되자 인싸 이웃은 하루가 멀다 하고 홈 파티를 벌였다(화난 이웃이 벽을 내리치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기도).


화곡동으로 이사하자마자 코로나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맛집은 한 군데도 가 보지 못했다. 우장산과 가양대교에서 산책만 내리 했다.




이사한 집에 세간살이를 욱여넣다 말고 몇 번이나 마주보며 실소했다. “어떻게 원룸에서 둘이 살았지?” “고시텔에서는 어떻게 살았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텔레비전에도 감사하고, 싱글 침대에 둘이서 자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이 나이에는 그럴 수 있지’라는 안일하기 짝이 없지만 마냥 싫지 않은 낙천주의 덕분이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집이었지만, 쓰던 물건을 늘어 놓으니 제법 포근해 보인다. 저녁거리를 살 겸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니 더 마음에 든다. 정육점 주인은 친절하고, 거리는 조용하고, 도서관은 가깝다. 누구누구는 이십몇 평짜리 아파트를 요즘 유행하는 인테리어로 꾸며 놨다는데. “아직은 괜찮지 않아?” 하여튼 이번 생에 양반 되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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