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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Mar 08. 2022

그래서, 내가 하려던 말은…

'의'의 의의

잡지사를 다닐 무렵, 다축 가공에 관한 연재 기사를 맡은 적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컨트롤러 회사를 찾아가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실제 가공 장면을 본 다음 기사를 쓰는 식이었다. 이 분야를 대단히 잘 알아서 기사를 맡은 것은 아니다. 수학 성적은 바닥을 기고, 공간지각능력은 없다시피 하다. 각 축의 움직임을 이해해 보려고 고개를 90도로 꺾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며 용쓰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다행히 기사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어려운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쓰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들어찼다. ‘내가? 쉽게 쓴다고?’ 나는 멋쩍은 얼굴로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둘러댔다. 그러면 상대방은 당연한 말이라며 웃어넘겼다. 대단한 비밀이 있지만 내어 주기 싫어서 그런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일까. 글쓰기 관점에서 이해란 용언(동사와 형용사)의 주체를 알고, 문장 간 앞뒤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눈으로 읽고 ‘맞아, 그렇지’ 하고 넘어가는 선에서 그치면 안 된다. 유의어를 넣고 문장 성분 순서를 바꾸더라도 자유롭게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인풋을 마쳤다면 다음은 아웃풋이다. 이해한 내용 그대로 풀어서 쓰면 된다. 하지만 용언의 주체를 밝히다 보면 ‘주어+동사(형용사)’ 구조만 이어지는 몰개성한 글이 나오고(짧고 간결한 문장과는 다르다), 앞뒤 관계에 매달리다 보면 접속사가 덕지덕지 붙은 글이 나온다. 이마저 세련되게 다듬어야 아름다우면서도 누구든 명쾌하게 이해하는 글이 완성된다. 내가 ‘아직도 우리말 공부’를 하는 이유도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다.


그러나 방법을 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책상 너머에서 유혹의 손길을 흔드는 ‘도피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조사 ‘의’다.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을 완벽히 파악했는지 긴가민가하다면 조사 ‘의’를 전부 빼 보면 된다. 말맛을 살리는 장치다? 나중에 다시 넣으면 되니 일단 다른 표현으로 바꿔 보자.


N 공장의 가장 큰 문제는 표준화의 부재였다. 따라서 이상치를 검출하더라도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대처가 달랐다. AR을 적용하자, 태블릿 PC로 장비의 AR마커를 스캔하면 숙련공의 보수 이력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작업자의 편차가 줄어들었다.


눈으로 슥 훑으면 별문제 없는 문단이다. 어떤 내용인지도 얼추 이해된다. 하지만 조사 ‘의’를 볼드 처리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세 문장에 ‘의’가 여섯 번이나 나온다. 문장을 하나씩 살펴보자.



N 공장의(=공장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표준화의 부재(=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였다. 따라서 이상치를 검출하더라도 숙련공과 비숙련공의(=간) 대처가 달랐다. AR을 적용하자, 태블릿 PC로 장비 AR마커를 스캔하면 숙련공의 보수 이력을(=이 어디를 어떻게 보수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므로 작업자의(=에 따른) 편차가 줄어들었다.



호불호가 나뉠 테지만, 이만하면 훨씬 매끄러워졌다. 문제는 노란색으로 표시한 ‘의’다. 장비와 AR마커 사이 관계를 추측해 보자. 스티커로 된 AR마커를 장비에 붙였을까? 레이저 가공으로 각인하는 방법도 있다. 장비에 할당된 AR마커이므로 작업 지시서 같은 서류에 인쇄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지 모를 때 ‘의’는 맨 먼저 떠오르는 도피처다.


정답은 ‘장비의(=에 부착된) AR마커를 스캔하면’이다. 여담이지만 글에서 설명하는 장비는 커다란 냉각 설비다. 2016년쯤 쓴 기사인데, 실제로 지면에 실린 글은 수정 전과 후 중간 정도다.


시간? 소중하다. 모르겠다고 해서 일일이 검색하거나 전화로 확인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바쁘다. AR마커를 장비에 붙였든 새겼든 무슨 상관인가. 사소한 것일랑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소한 것이 쌓이면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글이 된다. 내가 이해 못하는 글을 남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일은 지독한 오만이다.


‘의’가 없으면 어색하지 않을까. ‘그림 속 떡’이나 ‘내가 살던 고향은’처럼 말이다. 걱정되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이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이병철 저, 천년의상상, 2021)다.



책은 세 장으로 나뉜다. 1장(앙꼬빵·곰보빵·빠다빵)은 “일본어를 내치지 못하고 영어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우리말조차 바르게 쓰지 못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사라졌거나 아직도 남은 일본어 잔재를 이야기한다. 2장(내가 사랑한 네거티브 인생)에서는 신문사 기자, 교정 전문 기자 등을 거친 저자가 남의 글을 수없이 읽으며 느낀 점을 담았다. 3장에서는 앞서 지적한 ‘개선해야 할 언어환경’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 책은 다른 글 인용을 빼고는 조사 ‘의’를 한 번도 쓰지 않는다(’것이다’로 끝맺은 문장도 없다). 처음에는 소매를 걷으며 ‘어디 한번 찾아 볼까’ 하고 생각했지만, 책장을 넘기는 동안 초심(?)을 잊을 만큼 글이 매끄러웠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 ‘의’를 남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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