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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Aug 24. 2023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

성별 반전 AI 프로필을 만들어 보았다

네 번째 마감을 무사히 마쳤다. 여기서 ‘무사히’라는 부사는 ‘마감 시간을 지키다’라는 구절만을 수식한다. 내 컨디션은 수식하지 못한다. 번역물의 퀄리티는… 반쯤 수식한다고 해 두자. 마감과 싸운 보름 동안 몸무게는 4kg이 빠졌고(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마감 당일에는 체기 때문에 먹은 걸 게우고 책상 앞에 앉고 또 게우고 책상 앞에 앉기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무사히’ 마쳤다. 에이전시에 보내는 메일 속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고, 하루를 꼬박 쉬니 몸 상태도 돌아왔다.


달콤한 여유를 입안에 든 사탕처럼 굴리며 할 일을 찾아 나섰다. 한 달 넘게 쓰지 않아 먼지가 쌓인 커피 머신을 닦고, 샌드백처럼 단단해진 청소기 먼지봉투를 갈고,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타공판을 정리하고,


AI 프로필을 만들었다.


발단은 삼성 라이온즈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AI 프로필 고르기 영상. 지금은 몬스터즈 팬이지만(144경기 너무 많아)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KBO 영상은 팀을 가리지 않고 본다. 선수들의 여자 버전 AI 프로필이라니, 이 섬네일을 어떻게 그냥 지나친단 말인가. 영상을 보다 보니 내 사진으로 남자 버전 AI 프로필을 만들면 어떨까, 문득 궁금해졌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다부진 턱선 때문인지 남상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정도라는 것을 모르고 진하게 화장했을 때는 여장남자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다카라즈카 남역 정도만 되었어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텐데.


나 혼자만 하기는 아까우니까 K군의 여자 버전 프로필 사진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K군은 어릴 적 여자아이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수염 자국이 선명한 삼십 대 성인 남성이지만(북극곰을 닮았다느니 동안이니 하는 주접은 잠시 넣어두도록 하겠다). AI 프로필 사진을 만들려면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 10~20장을 제출해야 한다. 사진이 많을수록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나나 K군이나 셀카를 거의 찍지 않아서 고를 만한 사진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마침 두 달 전에 웨딩 사진을 찍은 것이 있었다!


24시간 뒤.



안 닮았으면 ‘AI도 별것 아니네’ 하고 웃어넘겼을 텐데, 내가 봐도 눈매가 복사+붙여넣기였다. 동생도 내 모습이 남아 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나는 어떤 애니메이션을 보든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얇은 안경 캐릭터를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변용된 나르시시즘이 아니었나 싶다. 이 이상형은 나이가 들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완전히 뒤바뀌기도 했고.



K군의 AI 프로필 중 가장 비슷한(?) 사진. 처진 눈매와 도톰한 애교살, 동그란 코끝, 오붓한 입매까지. K군의 특징을 하나하나 잘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K군이 이 사진은 올려도 된다고 흔쾌히 허락한 것을 보면 이 사진은 자기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성별부터가 다른데 자기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더 이상하려나).


K군은 K군이든 K양이든 변함없이 귀엽지만, 나는 아무래도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고 한들 저 프로필 사진처럼 될 수 있을까. 같은 성별 버전으로 AI 프로필 사진을 만들어도 ‘누구세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마당에.


내 키는 162cm다. 딱 여성 평균 키니까 남자로 태어났더라도 174cm 정도였겠지. 식습관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체형도 더 찌우라느니 더 빼라느니 잔소리나 듣지 않는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성형은 물론 피부과 시술에 관심이 없고, 헤어 스타일도 내게 어울리면서 관리가 쉬운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남자로 태어났더라도 피부 관리라고는 스킨, 로션, 선크림이 끝이고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왁스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프로필 사진 속 나 아닌 나도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남자였더라면 K군은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헤테로섹슈얼성에 한 점 의심을 갖지 않는 K군은 빈말로라도 ‘너라는 사람 자체가 좋으니까 성별은 상관없어’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 내가 남자로 K군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수많은 평행 세계 가운데 남자인 나와 K양이 다정하게 웨딩 사진을 찍은 곳이 한 군데 정도는 있지 않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AI 프로필 사진은 또 다른 상상으로 향하는 다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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