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번역에서 또 떨어졌다. 이제는 몇 번째인지 세지도 않는다.
처음 샘플 번역에서 떨어졌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책을 n권 번역하는 동안 샘플 번역에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샘플 번역에 덜컥 붙어 번역가로 데뷔했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초심자의 행운’이다. 그 행운이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갔고, 떨어질 때가 되어서 떨어졌다.
샤머니즘을 믿지 않는 나지만, 갈피를 못 잡는 멘탈은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서부터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삼손이냐고). 파일에 문제가 있어서 열리지 않았던 건 아닐까. 사고 체계에 이상이 생겨서 내가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장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고 다른 사람 눈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궤변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잠깐, 그럼 지금 이 글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도 이유를 알고 있다. 나보다 번역을 잘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한 명 내지는 두 명. 책 한 권을 놓고 번역가 세 명이 경쟁한다. 무승부는 없다. 1등을 차지하지 못하면 샘플 번역에 쏟아부은 사흘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대단한 책이라고 한들 샘플 번역에 참가한 것만으로는 어디 가서 내세울 수도 없다.
이미 지나간 일로 끙끙 앓아 봐야 무슨 소용인가. 간발의 차로 떨어졌을 거라고 믿으며 털고 일어나는 수밖에.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바로 일본어 공부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어 작문 공부다. 한일 번역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명색이 일본어 번역가라는 사람이 비즈니스 메일을 쓰거나 SNS에 올릴 짤막한 글을 쓸 때마다 머리를 싸매는 것도 조금 꼴사나우니까.
일본어로 글을 쓸 때 신경 쓰이는 것은 어휘력보다도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쓸지 한자로 쓸지’ ‘쉼표를 찍을지 말지’ ‘個, ケ, カ의 차이’처럼 사소하지만 자격증 책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이다.
<교열 기자의 눈(校閲記者の目)>(마이니치신문 교열그룹 저, 2017)은 손으로 쓴 글씨를 식자(植字)하는 과거 신문 제작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실수부터 ‘超える’와 ‘越える’처럼 헷갈리기 쉬운 한자까지 일본어 사용자가 알아 두면 좋은 내용을 엮은 책이다. 마이니치 교열그룹에서 운영하는 웹 페이지와 트위터에 올린 내용을 다듬은 글이라 호흡이 짧고 읽기 편하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칼럼은 실제 간판이나 유인물에서 발견한 실수를 소개하고 있어 ‘일본어가 모국어인 사람들도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궁금증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숫자를 대신 넣었을 때 말이 되면 아라비아 숫자로, 말이 안 되면 한자로 쓴다고 한다. 우리말에서 ‘한번’과 ‘한 번’의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
‘한 사람 몫을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一人前の俳優になりたい)’에서 ‘한 사람’은 그 자리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넣을 수 없으니까 한자로 쓴다. ‘배우 한 명이 서 있다(1人の俳優が立っている)’는 서 있는 배우가 한 명이 될 수도, 두 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숫자로 쓴다. 어디까지나 마이니치신문의 자체적인 기준이지만 제법 참고할 만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超える’와 ‘越える’ 말고도 일본어에는 헷갈리는 한자가 매우 많다. 똑같이 ‘카게(かげ)’라고 읽는 ‘陰’과 ‘影’은 양반이다. 사전에서 찾아 보면 ‘陰’은 그늘이고 ‘影’은 그림자다. 한국어 사용자라면 뉘앙스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카타이(かたい)’라고 읽는 ‘固い’와 ‘硬い’와 ‘堅い’는 전부 굳고 단단하다. 어떤 상황에서 뭘 써야 하는지 어렴풋이는 알겠는데 언어로 조리 있게 설명하자면 입이 다물어진다.
이럴 때 도움 되는 책이 <한자 가려 쓰기 해설 사전(漢字の使い分けときあかし辞典)>(엔만지 지로 저, 2016)이다. 605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에(심지어 2단 편집이다) 헷갈리기 쉬운 한자 표현이 사전 형식으로 실려 있다. 예문과 도표가 풍부해 이해하기 쉽다. 한자 변환기에 등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잘 쓰이지 않는 한자나, 히라가나로 쓰는 쪽이 일반적인 표현도 알려준다. 책장에 갖춰 두고 헷갈리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후루룩 찾아 보기 좋은 책이다.
지난 달,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 갔다. 입국 신고서를 적던 나는 직업란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며칠 전 샘플 번역에서 떨어진 참이었다. ‘무직’이라고 쓸까. 아니면 ‘주부’? 고민 끝에 ‘번역가’라고 썼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일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갑자기 일을 맡게 되었을 때 얼마 만에 맡든 간에 최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아닐까. 언제 어떤 기회로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일본어든 한국어든 녹슬지 않게 잘 벼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