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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7. 2020

직장인 여행자-(6)서울과 여행지에서의 시간_하노이

같지만 다른 시간의 밀도

회사를 다닐 때의 하루와 이곳에서의 하루를 비교해보면, 과연 그 하루가 같은 시간이 맞나 라는 의문을 품게 될 만큼 체감시간이 달라. 한국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씻고,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 하루가 끝나잖아.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없는 없지. 그냥 하루가 지나가 버려.


그에 반해, 이곳에서의 하루는 정말 달라. 

어떤 카페에 가서 모닝커피를 마실지, 어느 곳을 걸으며 구경을 할지, 저녁 메뉴를 무엇으로 정할지, 몇 시에 숙소로 돌아갈지 등등,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있어. 

한 시간, 한 시간, 모든 시간을 모두 내가 결정할 수 있어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니까. 퇴근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네 하며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길 바라는 모습과 정말 대조돼.



같은 하루의 시간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니. 


물론 회사에서나 여행지에서나 바쁜 건 똑같아. 여유 있는 여행을 하고 싶지만 언제 또 연차를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에 시간을 쪼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힘들더라도 조금 더 많은 것을 보는 일정을 택하게 돼. 

몸은 힘들지만 차라리 그게 마음이 더 편해. 비행기 티켓, 호텔 숙박비에 투자한 돈이 아깝게 느껴져서는 안 되니까. 직장을 다니는 한, 이런 여행 스타일은 쉽게 변하지 않을 거 같아. 



하지만 같은 바쁨이라도 그 시간의 밀도는 명백히 달라. 그 다름을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시간을 계획하는 주체가 ‘타인이냐, 본인이냐’에 있어. 회사에서는 자유가 없잖아. 내 시간이지만 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없으니까. 


회사에서의 시간에 주인이 내가 아닌 나를 고용한 회사에 있어. 그래서 난 당연히 그 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며, 그의 요구에 의해 움직여야만 해. 회사가 내게 돈을 주는 한 이것은 응당 당연한 것이며, 난 이것에 순응해야만 하지.

여행지에서는 이 상황과 정반대로 돈을 소비하는 입장으로 변해. 돈을 쓰기 위해 돌아다니고, 먹고 경험하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야. 돈을 위해 시간을 파는 입장에서 돈으로 시간을 사는 입장이 된 거야.


한국에서, 그것도 평일 밤에,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난 자신 있게 없다고 말할 수 있어. 

특히 제안서 작성 기간엔 지진이 나서 회사 건물만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고,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도 있어. 

반대로, 내일 아침이 빨리 와서 출근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아마 이것이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일 거야.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 



여행은 일종의 최면인 거 같아. 

현실에서 일을 하며 마주치는 힘듦, 치사함, 비열함 등을 견디는 이유를 주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8월이 올 거고 그때가 되면 방콕에 갈 수 있어’, ‘방콕은 마사지가 저렴하다고 하니, 하루에 한 번 마사지를 받아야지’ 등의 주문을 끊임없이 걸어. 그럼 그 최면에 빠져들어 현실을 견디게 되는 거지.


누구도 굳이 그 최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 여행이라는 이유라도 있어야 회사를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이니까. 나 역시 그 최면 덕분에 계속해서 회사를 다니고 있고, 가끔 짧지만 달콤한 시간을 경험하고 있어. 그 꿈은 너무 달콤해서 ‘지금의 인생에선 이거면 됐다’ 라는 나태함을 줘. 



이래서 내가 큰 꿈을 꾸지 못하나 봐. 건조한 일상이 지속되다가 가끔 펼쳐지는 환상에 모든 의지가 사라져 버려. 이직을 해서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지, 외국어를 배워 능력을 키워야지 등의 의지가 초기화돼. 

진짜 문제야. 여행은 지나치게 달콤해. 먼 미래를 보고 계획적인 인생을 설계하는 대신 당장의 달콤함만을 쫓게 되니까. 


이번 생엔 성공하긴 그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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