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erse System - fig.4 -Adolescence-
동인음악 레이블 Diverse System은 다양한 컨셉을 갖고 컴필레이션 음반을 프로듀스하고 있습니다. 특정 음악 장르, 고참 아티스트 리스펙트 등 주제는 다양하지만 특히 개성 있는 테마를 잡고 제작하는 시리즈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 주목할 만한 하나가 fig.시리즈입니다.
fig. 시리즈는 디자이너가 제시한 디자인과 부제만 가지고 참여 아티스트들이 수록곡을 제작하는 시리즈이며, 현재 총 다섯 개의 작품이 발매되어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네 번째인 「fig.4 -Adolescence-」입니다. 단순히 fig. 시리즈 뿐만 아니라 Diverse System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중 단연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만큼 강한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 음반의 주제는 사춘기(Adolescenc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음반을 잘 이해하고 싶다면 사춘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참여 아티스트들이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감상하는 청자가 이 모든 맥락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 지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사춘기의 주요 정서가 우울과 불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아주 미시적인 저라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서를 중점으로 두고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fig. 시리즈의 컨셉상 자켓 디자인(아트)에 대한 논의도 이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데, 이는 작품의 첫 시작 모티프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켓 아트를 볼때 가장 시선을 빼앗겼던 것은 앞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동자였습니다. 눈빛은 반짝이지만 동시에 미묘한 흔들림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것이 사춘기를 겪는 인간 세상을 향해 강한 호기심을 갖지만, 동시에 상냥하지 않은 세상을 향한 두려움을 표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처럼 주변을 더 알고 싶은 왕성한 욕심이 있더라도 어른처럼 절제해야만 지킬 수 있는 신변 사이의 갈등은 안정감을 흩뜨립니다.
또 소녀가 입은 옷은 세라복입니다. 지금은 흔한 일본 학생들의 교복이지만 원 형태를 거슬러 올라가면 해군의 군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는 투쟁하는 존재의 상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뒤로 감춘 손에는 왠지 권총이 들려 있을 것 같은 상상도 하게 됩니다.
앨범 아트에서 묘사되는 배경이 황폐한 도시인 것도, 마치 전쟁을 치른 뒤 건물이 불타고 부서진 후 남은 흔적이 가득 깔린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연 안개는 매캐한 연기 같아 보여, 화염과 폭발이 미처 가시지 않은 어둑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자켓 속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더라 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배경에는 이런 참혹함이 깔려 있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관점을 넘어 앨범의 음악에 대해 전반적으로 조망하면 잔잔한 트랙과 격정적인 트랙이 혼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춘기의 요동치는 감정 기복을 나타내는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앨범에 참여한 작곡가진도 분명 격정적인 시기를 겪었을 것이며,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분명 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울렁이는 정서가 전해지며, 이 부분은 제가 이 작품에 강한 감명을 받은 이유입니다.
사춘기는 변화의 시기입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탈바꿈을 겪으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에 변화를 알립니다. 첫 트랙인 Camouflage Announce는 이 앨범에서 사춘기라는 주제가 일관적으로 흘러나올 것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사춘기를 겪는 사람의 주변인이 그를 수용하든 하지 않든 본인이 겪는 감정을 알리기 위한 시작의 기운이 가득 느껴지는 트랙이었습니다.
또한 사춘기는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기 전이므로 아이로서 간직한 순수한 소망 내지 희망을 걸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기반이 단단한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그 형태가 견고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Best Wishes와 FLY를 들으면, 소망을 담은 반짝이는 별빛이 하늘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이 아름다움과 동시에 그 빛이 산란되어 곧장 흩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집니다. 여리고 불완전한 빛의 형태는 흐린 하늘을 나는 새가 방향을 잃는 것과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봐도 날개를 활짝 핀 경쾌한 활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Defeated는 과거에 이기기도 했지만 (defeated) 어쩔때는 지기도 하는 (be defeated), 연패라는 중의적인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는 트랙이었습니다. 사춘기는 엎치락 뒤치락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Railroad와 Terminal을 들으면 거대한 도시의 길게 늘어선 철로와 웅장하고 컴컴한 터널도 생각나는데, 한없이 길어서 어디든 뻗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가도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절박함이 떠오릅니다. 길은 인생의 가장 흔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러한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 지 알 수 없는 와중에 캄캄한 시련이 찾아오면 굉장히 크게 느껴집니다. 이런 시기에는 쭉 뻗은 길이 무한한 미래보다는 끝없는 좌절처럼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사춘기를 겪는 이들은 의심할 바 없이 분명 세상에 존재하나,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힘들고, 때문에 ‘비(非)존재하는 존재’ 처럼 세상을 떠도는 모습이 Phantom이라는 곡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인 관점에서 망령은 있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고민하고 방황하며 배회하는 영혼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수록곡들이 한 가지 주제로 집결되는 통일성이 뚜렷한 앨범이지만, 역시 전체 앨범 내에서 가장 주제 의식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곡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마지막 트랙인 until eternity ends라고 생각합니다. ‘영원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라는 곡 제목은 저에게 와닿는 부분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 트랙은 비교적 잔잔하게 시작하지만 이후 혼란이 담긴 전자음이 선을 마구 긋듯 휘젓는 중반부에, 애잔한 허밍이 들리다가 이윽고 잦아들며 깔려있던 전파신호 같은 음이 지직하고 툭 끊기면서 끝납니다. 괴로운 우울과 불안의 정서가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에 다다르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을 때 마다 절절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러한 먹먹한 여운은 저에게 있어 글을 쓰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춘기의 한자는 생각할 사(思), 봄 춘(春), 기약할 기(期)입니다. 거칠게 풀면 봄을 생각하며 기약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봄(春)은 성적인 욕구와 연결 짓는 방향으로 해석되곤 하지만, 저는 의미를 확장하고 싶습니다. 우울과 불안의 지배를 기어코 지나 빛나는 세상인 미래를 바라보는, 그런 욕구를 가진 시기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춘기는 인생에서 거쳐가는 여러 단계 중 하나인 동시에 사고관, 세계관, 가치관 등이 하나둘씩 정립되어가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희망어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지향점을 바라보는 때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춘기는 단순한 2차 성징기 그 이상의 의미일 것이며, 나아가고 싶은 봄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춘기를 겪는 이들의 눈빛은 흔들릴지언정 그 눈동자에 아로새겨진 풍경은 봄일 것입니다.
Website: http://fig4.diverse.jp/
Bandcamp: https://diversesystem.bandcamp.com/album/fig-4-adolesc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