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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May 02. 2022

18.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두 명의 친구와 연달아 통화를 했다. 이 두 명은 그들의 인간관계에 현주라는 한국 여자가 얽혀있다는 것 말고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둘과 연달아 이야기를 하며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서 열심히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구나. J는 대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다. 그와 함께 졸업하지는 못 했다. J가 3학년 무렵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하는 바람에 서로 다른 학교에서 다른 시기에 졸업을 했다. J는 눈이 똘망똘망하다. 나는 그를 다람이라고 부르는데 다람쥐가 야무진 두 손으로 도토리를 잡고 열매의 구석구석을 큰 눈으로 살피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 모든 일을 재빠르고 야무지게 다룬다. J는 스스로 그것을 아는 듯하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고 그 능력을 믿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J에게 늘 있다. 그 덕에 옆에서 보는 나까지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스스로를 믿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J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많은 일들을 차근차근 해냈다. 편입도 그중 하나였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기도 했다.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여 과장급들도 해내기 어렵다는 일들을 그들과 나란히 했다. 내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J는 가끔 그 성취와 자신감의 나나들 사이사이에 작은 물음표들을 던져온 듯하다. 이를 테면, 지금 이대로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앞으로도 이런 나날이 이어져도 되는 걸까,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방향을 잡아야 할 때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물음을 품을 때면 늘 내게 질문을 공유한다. 현주야 요즘은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그래? 그런가...? 또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도 괜찮은가? 그러면 나는 그를 대신해 괜찮다는 말을 하다가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둔다. 자기 확신과 의문의 줄무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 J의 삶 그리고 나의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안다.


J가 이직을 앞두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다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N은 체코에서 만난 입사동기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번역회사에 입사한 날 그를 만났다. 입사 첫날에는 그 친구를 방글라데시에서 온 여자, 키가 나랑 비슷하군,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함께 두 달 정도를 알고 지내니까 이제는 서로의 아침식사 메뉴도 묻는다. N은 이슬람교를 믿어서 얼마 전까지도 라마단 기간인 한 달 동안 금식을 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꾸만 뭘 먹었냐고 물었는데 한국 특유의 안부인사 "밥 먹었어?"의 취지였던 것이다. 그때마다 N은 홀쭉한 얼굴로 라마단 중이라고 했다. 알라를 믿지 않는 나는 늘 배부른 상태로 얼굴에 윤기가 흘렀는데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한국식 안부인사가 라마단 기간 중인 이슬람교도인들에게는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 


N은 사교성이 좋아서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특유의 사교력으로 N의 팀에서는 이미 하하호호 농담도 주고받는 듯했다. 그런 N이 잘렸다니. 이 갑작스러운 소식은 N이 할 말이 있다며 전화를 하면서부터 듣게 됐다. N은 미국 회사들이 얼마나 얄궂게 사람들을 자르는지는 들어봤어도 그게 자기 일이 될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상황인즉슨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 내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우크라이나랑 가장 가까운 지사인 체코 지사에 영향이 온 모양이다. 어쩐지 요 며칠 일이 없이 한가하더라니 체코 지사로 들어오는 일이 점차 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사에서 체코 지사의 직원을 해고하라고 얘기한 것 같은데 그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갑자기일 줄은 모두가 몰랐다. N이 해고 통보를 받은 날 카운터에서 사원증을 반납하려는데 카운터 직원이 놀라 물었단다. "N도 나가는 거예요? 오늘만 벌써 19명째네요..."


N은 그 이야기를 전하며 내게도 경고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많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는 반복 했다. 어이가 없어서 성을 내다가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다시 체념을 했다. N을 대신해서 더 힘껏 화를 내주고 싶었다. 그리고 N을 대신해서 앞날이 두려워졌다. 내가 하루아침에 잘리면 비자는 어떡하지, 월세는 또 어떻게 내지, 링크드인에 이력서를 써 놨던가, 체코어를 빨리 배워야겠다, 한국어 수업은 계속되겠지, 한국에 갑자기 들어가게 되려나, 들어가면 뭐 하지, 갑자기 아득해지던 차에 N은 내게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염치도 없어라. N보다도 내 걱정에 앞서 N이 나를 위로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N에게 격려의 말을 했다. 라마단 기간도 지키는 성실한 신자가 여기에 있는데 정녕 알라가 있다면 꼭 N을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N은 내일부터 이슬람교의 가장 큰 명절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날이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때에 이런 기분 나쁜 소식을 들어서 더 기분이 묘하다는 N. 이럴 때는 무어라 말해줘야 할까. 한국어로도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영어로는 더욱 모르겠어서 아임 쏘리를 난발했다. 


두 친구와의 전화 통화를 마치고 복잡한 마음에 괜히 인터넷을 켰다가 책을 읽었다가 주변을 서성이다가 만둣국을 해 먹었다. 불편한 마음이 들 때는 한국 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향과 맛의 만두가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나는 여기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일을 찾고 반복하고 키워낼 수 있을까. 살아남기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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