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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an 10. 2022

17. 김치 주부 훈장

며칠 전 김치를 만들었다. 한국에 있을 땐 잘 먹지도 않는 김치를 프라하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다. 김치가 배 타고 넘어오면 금치여서 가격이 훌쩍 뛰는 바람에 한 봉지에 500g 하는 김치를 겨우 사서 조금씩 아껴 먹는다. 물론 아무리 비싸도 만원 안팎이지만 꼭 식비에 쓰는 돈은 왜 이렇게 아까운지. 결국 해가 넘어가며 직접 김치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해 큰 다라이도 구하고 (김치 박스는 다라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다.) 대용량 락앤락도 샀다.


저번에 무김치를 만들 때 무를 절이지도 않고 고춧가루만 무턱대고 넣어서 텁텁하고 쓴 무김치를 만든 기억이 있다. 그것을 김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무와 고춧가루의 향연 속에서 다음엔 꼭 요리법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백종원 김치'를 네이버에 검색해서 참 쉽고 설탕이 많이 들어가는 백종원 아저씨의 요리법을 차근차근 따라갔다. (백종원 요리사는 꼭 요리사 말고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백종원 아저씨는 초보의 마음을 안다. 초보는 한자어로 말 그대로 처음 내딛는 걸음이라는 뜻인데 처음이니 쉬울 리가 없다. 무엇보다 넘어질까 봐 두렵지 않을까. 어떤 영역이든 무관하게 그런 초보자들과 초보자의 마음은 존재한다. 나는 몇 가지 영역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것에 초보인데 요리는 말할 것도 없이 초초초 초보다. 뭘 잘못 넣으면 음식이 금방 망가져버릴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새 모이만큼 조미료들을 넣는다.


백종원 아저씨는 그 마음을 정확히 간파해서 계량을 종이컵으로 한다. 부욱- 부욱- 넣으라는 것이다. 걱정 말고 설탕 반 컵. 고춧가루는 한 컵 반. 백종원 아저씨를 따라서 손 크게 넣다 보면 색이 어느새 그럴 싸 하다. 자 이제 다음 조미료. 새우젓?


아 큰일 났다. 새우젓이 없다! 초보는 당황한다.


그럼 백종원 아저씨는 당황한 눈빛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느긋하게 말한다. 없어도 돼유- 새우젓 없으면 소금으로 하면 돼유- 새우젓만큼 소금을 넣으면 돼유-


아주 다행인 마음으로 새우젓 대신 소금을 넣고 다시 양념을 휘휘 젓는다. 중간에 맛도 좀 보고 싶은 용기가 나지만 혹시라도 그 맛이 아닐까 봐 일단 요리법을 따라간다. 마늘도 까서 다지고 생강도 갈아서 넣고 대파도 쫑쫑 썰고 양파도 쪽쪽 층내서 와르르 쏟아 김치 속을 만들고 양념이랑 함께 젓는다. 잠시 뒤 물기를 뺀 배추에 양념을 무친다. 어디에서 본 건 있어서 쪼그려 앉아 배추 앞뒤에 뻘건 양념을 착착 무쳐가며 제법 어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노련한 손으로 김치를 휘둘러서 입에 쏙 넣어주던 엄마들의 모습. 내가 조금은 닮아가고 있구나. 그 생각에 이 김치를 가장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 엄마였다. 가족 대화방에 빨간 김치 사진을 찍어 보냈다.


현주(나): 나 어제 김치 만들었다


은주(동생): 오 대박 거기서 김치 팔아 길에서 레모네이드처럼


현주: 신고당할 듯ㅋㅋㅋ


은주: ㅋㅋㅋ


은주: 집 앞에서 김치를 팔아볼까 해


은주랑 내가 장난치는 사이 엄마는 일하다 말고 미리 보기로 뜬 은주의 마지막 말에 깜짝 놀라서 우리 집 막내가 김치를 팔겠다는 줄 알고 헐레벌떡 대화에 참여했다.


진혜(엄마): 깜짝이야 문자만 보고 집에 있는 김치까지 은주가 판다고 하는 줄 알았네 


진혜: 현주 김치도 다 담그고 주부로 변해가네 맛있게 됐어?


진혜: 보기는 좋아 보이네


나는 주부라는 말이 새삼 생경하게 다가와 스스로를 주부라고 칭해 보았다. 혼자 살면서부터 빨래하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화분 물도 주고 세금 내고 분리수거하고 김치도 만들어 봤는데 그 하나의 단계마다 점점 주부에 가까운 모양이 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서 어른스러운 아이로 그리고 이제는 정말 그도 아니라는 것을. 그곳에서 한참을 독립했다는 느낌이 묘하지만 좋게 다가왔다. 주부를 마치 명예 독립 훈장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뿌듯해하기를 며칠이 지나고 김치가 맛이 좋게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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