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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ug 31. 2019

[안식년 6화] LP, CD, 한남동


나는 비 오는 날이 항상 싫었다. 학창 시절에는 무조건 운동화를 신어야 했던 터라 학교에 도착하면 양말은 다 젖어 있고  젖은 채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직장생활 할 때에는 통근 시간이 1시간 반이었는데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시간 동안 느껴야 했던 축축함과 평소보다 더 붐비는 지하철이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은 너무나 불쾌했다. 비는 번거로움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세찬 빗소리를 듣고 그동안의 불쾌한 기억과 두통이 함께 몰려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벌써 7시 20분. 6시에는 일어나야 운동하고 씻고 아침 먹고 나가야 별다방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잔 하며 신문 볼 수 있는데 이것마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부지런한 남편은 벌써 수영장에 갔는지 옆 자리가 비어 있다. 다행히 이 집의 게으름뱅이는 나 하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7시 40분.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는 안식년이라면서 왜 그렇게 일어나는 시간에 엄격하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한정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정해진 일과를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일과가 없으면 빈둥 빈둥거리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잠 또는 핸드폰 만지작 거리기로 이어지는데 그런 시간을 반복적으로 보내면 우울함이 찾아온다. 어느 순간 잠도 잘 오지 않고 자려고 누우면 ‘아,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는 건가?’라는 죄책감으로 번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계획표를 세워 사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안식년을 사는 사람과 노동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인 다른가요?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답은 간단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일과에 넣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8시. 수영 갔다 온 남편은 얼굴에 선명한 수경 자국을 남기고 돌아왔다. 아직도 침대에 축 늘어져있는 나를 보고 말한다.

이럴 줄 알았어. 비 오는 거 보고 못 일어날 줄 알았어.
오늘 별다방 가지 말자. 다른 거 하자.
뭐 하고 싶어?
음악 들으러 가자.

우리는 종종 음악 들으러 한남동으로 간다. 장소는 한남동 주민센터 근처 LP 상점. LP, CD 심지어 카세트테이프까지 판매하는 그곳은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차 한잔 하기도 좋다. 결혼 전 사람 많은 곳 피해 주로 만나던 곳이 이곳이었고 지금 사용하는 LP플레이어와 LP도 모두 그곳에서 구입했다. 나름 애착 있는 곳이다. 특히 2층의 창가 자리는 다양한 음악을 CD 플레이어와 좋은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고 따뜻한 차와 함께 즐길 수 있어 좋다. 오늘도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 앉는다.

2인 기준으로 된 한 좌석에는 5개의 음악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앉은 그 테이블에는 우타다 히카루, 카를라 브루니, 레니 크레비츠, 산울림 등등 9가지 음반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충 귀에 익은 이름들이지만 그들의 앨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들어본 적은 없으므로 한 번 도전하기로 했다. 시작은 카를라 브루니의 French touch라는 앨범으로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를 두 손으로 들고 홀짝 거리며 창 밖을 바라본다. 어느덧 비는 그쳤지만 창문에 몽글몽글 매달려 있는 빗방울과 창 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음악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고 묘한 행복감이 올라온다.

그거 기억나? 전에 식당 창업 관련 수업 들었을 때 말이야. 매장 배경음악 관련 수업 있어서 플레이 리스트 가져갔는데 우리 꺼 별로라고 엄청 무시했던 거.
맞아. 그러고는 이유도 설명 안 해줬지. 그냥 별로라고만 했어.

식당을 하기 전 비싼 돈 주고 들었던 창업 수업이 있었다. 나름 유명한 사람이라 기대도 많이 했는데 실제 수업을 들으니 자기 자랑과 자기 지인 사업 소개로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크리틱’이라는 용어를 앞세워 학생들의 과제물을 평가하는데 비판의 이유도 없고 대부분 ‘그냥, 별로야’가 대부분이라 굉장히 당황했었다. 그중 가장 황당했던 것은 사전 배포한 커리큘럼에 있던 매장 배경음악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이 뽑아간 플레이 리스트를 듣기만 하고 식당에서 사용하기 적절한 음악의 기준 설명 하나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조금은 조금은 이해되는 부분은 좋은 음악의 기준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음악을 가장 많이 들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알앤비와 소울에 빠져 있었다. 데스티니스 차일드를 시작으로 메리 제이 블라이즈, 알리샤 키스, 나중에는 블루 홀리데이까지 들었다. 지금 보니 주로 여성 보컬들로 그녀들의 꿀 바른 듯한 성대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책상에 있던 CD들을 보고 어느 한 친구는 쉬운 음악만 듣는다고 하면서 비틀즈와 퀸, 레드 제플린이 없는 내 리스트를 비웃었다. 이는 제대로 음악을 듣는 다고 할 수 없다며 비아냥 거렸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데스티니스 차일드 3집 살 돈으로 비틀즈 베스트 음악을 사고 말았다. 앨범에 포함되어 있던 음반 설명도 비틀즈의 위대함과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을 이 음반의 가치를 칭찬하고 있었다. 이 음반이라면 나도 음악 좀 듣는다는 소리 듣겠군 하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나는 너무 실망했다. 그 유명한 ‘yesterday’도, ‘hey jude’도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say my name’보다 하나도 좋지 않았다. 비싸게 산 음반이니 어떻게든 좋아보려고 했지만 비틀즈의 CD를 볼 때마다 갖지 못한 데스티니스 차일드 2집이 생각나 점점 화가 났다. 결국 난 그 CD를 당시 밴드 음악에 빠져있던 내 동생에게 헐값에 팔고 용돈을 다시 모아 데스티니스 차일드 3집 샀다. independant women pt.1을 듣고서야 안정을 찾았다. 그 날 나는 음악적 독립(independant)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독립했건만 그 날 창업수업의 결과로 결국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모던 락을 (그 사람이 선호하는)을 가게에 틀기로 했다. 그 당시 가게를 위해 골랐던 장르는 보사노바였는데 이는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 시대 양식을 차용한 가게 인테리어와 맞고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골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 없는 퇴짜를 맞고 틀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므로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적당한 이유만 설명해 주면 수긍할 했을 텐데 그게 없었으니 그야말로 자신의 ‘개취 (개인의 취향)’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속만 상했었다.

카를라 부르니를 듣고 산울림을 지나 우타다 히카루 차례가 왔다. 첫 곡은 first love.

오빠, 이 곡 알아? 이거 나 고등학교 시절 일본어 시간에 선생님이 수행평가로 과제로 알려 준 노래야. 그때 과제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다 외워서 애들 앞에서 부르는 거였는데 노래 부르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다들 앞에 나가지 못했어. 그래서 결국 선생님은 자기 귀에다가 부르는 것으로 절충했지. 그래서 아이들 한 명 씩 나가 선생님 귀에 대고 이 노래를 불렀어. 그때는 그게 다행이다 싶었는데 한 명 한 명 하다 보니 그게 얼마나 웃겼는지. 나중에 선생님이 너무 힘들어했던 게 기억 나.

얼마 전 대화의 희열 ‘배철수’ 편을 본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퀸이냐 비틀즈냐를 투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이가 좀 있는 세대는 비틀즈를 골랐고 비교적 어린 세대는 퀸을 골랐다. 그 차이는 ‘그 시대의 문화를 함께 공유했는가’였다. 비틀즈 세대는 비틀즈가 가져온 유행을 함께 누렸던 시대였고 지금의 세대는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가 가져온 유행과 함께 퀸을 만났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택한 뮤지션은 어떤 기억을 불러오느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음악은 그 음악을 듣던 우리 모습의 기억이다. 나에게 우타다 히카루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고 이는 매우 행복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오빠는 내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한 참을 웃어댔고 결국 이야기는 각자의 고등학교 시절로 이어져갔다. 한 참을 이야기 하다 보니 어느덧 출출해졌다. 이제 일어 집에 갈 시간이다.

우리는 오늘, 고등학생의 서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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