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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영준 Dec 08. 2020

글쓰기법칙

33_책을 졸이다.

글씨를 읽을 줄 알면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읽기 때문에 하나의 글은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이해'가 만들어지죠. 쓰는 사람은 하나지만 읽는 사람은 저마다의 텍스트를 가슴에 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글을 읽더라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서로 다르게 읽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로 남기는 합니다. 독서 초급자라면 이런 문제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읽으면 되니까요. 한 번 읽은 내용은 며칠 지나면 어차피 잊혀집니다. 읽을 때의 감동만 간직하면 될 뿐입니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면 작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독서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해하는 이의 선입견을 최대한 접어두고 작가의 의지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가급적 유연한 정신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찾기 위한 어리석은 방편으로 독서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작가의 뜻이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면 책의 여백에 자기 뜻을 밝혀 두는 것도 좋습니다. 이것을 나는 '작가와의 대화'라고 부릅니다.     


책 한 권의 부피는 얇은 것은 80페이지, 큰 것은 4천 페이지가 넘습니다. 머리가 탁월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기 힘들죠. KBS 사회부 기자였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건과 관련한 조서나 판결문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법률용어를 이해하는 것도 많이 불편했습니다. 법학과 선배에게 부탁해서 책을 몇 권 소개받아야 했습니다. 권영성 교수의 민법 시리즈, 이시윤 판사의 민사소송법, 허영 교수의 헌법 교재와 이재상 교수의 형법, 형사소송법 등이었습니다. 꽤 많은 분량이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이나마 읽으면서 법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습니다. 그 후 방송국을 그만두고 작은 회사를 운영하던 어느 날 문득 서가를 올려다보았는데, 권영성의 민법 시리즈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저 책을 언젠가는 다 읽어야 하는데...' 하고는 서가에서 그 책을 뽑았는데, 책에는 밑줄뿐 아니라 깨알 같은 글씨로 내용 정리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이 책을 두 번 읽었던 것인데 십 년쯤 지나면서 읽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던 셈입니다. 책의 내용을 잊은 것이 아니라 책을 읽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다음부터 나는 읽은 모든 책은 가급적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좀 어려운 책을 읽으면 중간쯤 읽을 때면 맨 앞부분 내용은 잊어 먹는 경우가 많죠. 이럴 때 간추린 노트는 매우 유용합니다. 나는 책을 읽은 후에 보통 10분의 1의 분량으로 간추린 노트 작성하곤 합니다. 300페이지짜리 책을 처음부터 다 읽기는 부담스러워도 20~30페이지 분량의 간추린 노트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책을 간추리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을 모두 읽은 후에 간추리는 것입니다.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은 후에 그것을 간추릴 때 쓰는 방법입니다. 소설책을 이런 방법으로 정리합니다. 한 장(chapter)을 모두 읽은 후에 간추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책에 쓰는 방법입니다. 매 장의 구성이 독립적인 책인 경우에 매우 유용하구요. 나머지 하나는 밑줄만 간추리는 방법입니다. 책을 처음부터 개괄적으로 한꺼번에 읽기 어려울 때 쓰는 방법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책 한 권을 하루나 이틀 만에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읽다가 덮어 두고 며칠이 지나서야 다시 펼쳐 읽는 식의 간헐적 독서가에게 적합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으로 책을 간추릴 때는 간추린 노트를 만들 것을 염두에 두고 밑줄을 그어야 합니다. 앞 밑줄과의 연계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책을 읽는 것은 '탐색'의 과정이고, 실제적인 '사색'은 간추리는 과정에서 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간추릴 때 독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옮겨 적어도 좋지만 가급적 자기 생각을 적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간추린 노트’는 책을 간추린 것이지 감상을 기록하는 '독서노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추린 노트'는 글자 그대로 또 한 권의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는 대신 이따금 꺼내 읽을 수 있는 생각 꺼리가 됩니다. '간추린 노트'에는 책의 내용이 가급적 완벽히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간추린 노트'는 책의 완벽한 간략본이라야 하죠. 책을 읽은 감상을 써 놓은 것이 아니라, 책 내용을 졸여 놓은 것이라야 하는 겁니다. 너무 심하게 간추리면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만 책의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바꾸어 넣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쓰다가 그 생각에 취해서 너무 장황해지면 안 됩니다. 아무리 간추리더라도 원래 분량의 10분의 1을 넘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읽은 책을 간추리는 연습은 일반적인 '줄거리 쓰기' 연습과는 다릅니다. '줄거리 쓰기'는 책의 핵심을 향해 내용을 줄여 나가는 것인데 비해, '간추린 노트'는 책 그 자체를 줄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간추리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주의 깊은 독서가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은 빨리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10대 중반에 속독을 연습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빨리 줄거리를 파악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빠르게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독서가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보니 빠르게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재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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