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 Jan 22. 2022

[전하고 싶은 음악①] 늑대가 나타났다-이랑

-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이 언제 어디서든 겪을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끼익 거리는 곡의 시작은 주변 공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찰나에 발바닥에 깔리는 첼로 소리를 무대 삼아 독백 같은 문장이 안개처럼 퍼진다. 뒤를 이어 둥둥거리는 베이스와 어쿠스틱 기타,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음악이 넘실대기 시작한다. 그 넘실대는 물살이 온몸에 차오르고 이내 넘쳐난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심장은 두방망이질 친다.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3집 <늑대가 나타났다>에 수록된 동명의 곡을 처음 듣던 날, 에어컨이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출근길 버스 안에서 나는 눈물을 슬쩍 훔쳤다.


199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도원동에 드나들었다. 선배, 후배, 동기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도원동 재개발사업에 따른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며 밤낮없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도록 '철거투쟁'이 이어지고 철거용역업체 '다원건설(구 적준용역)'의 폭력으로 마을 출입이 어려워지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도 늘어났다. 벌건 대낮에도 마을에 들어서는 우리를 막아서며 "학생들, 어디가?"라고 묻는 용역들이 골목마다 즐비했다. 한해가 저물던 12월의 어느 날, 길어지던 싸움에 작은 힘이라도 되길 바라며 마을잔치를 열었다. 주민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뜨겁고 다정한 음식을 준비해 주셨고 우리들은 있는 힘껏 풍물을 울리며 함박눈 내리는 마을을 돌고 또 돌았다. 처음 만났을 때 데면데면했던 아이들도 이맘때쯤엔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춤을 췄고 함께 눈싸움을 하며 깔깔댔다.


두 달 뒤, 마을에는 '골리앗(철탑 망루)'이 세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철탑에 고립된 주민들에게 식량과 옷가지를 전달하려 동네에 진입하던 다른 지역 철거민 두 분이 철거용역들에 의해 폭행당했고 온 몸에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경찰병력 천여 명과 철거반원 3백 명, 특수진압대 40여 명, 구청과 재개발조합 건설회사 직원 등 1천 5백여 명이 행정대집행을 진행했다. 행진하던 학생 15명이 연행되고, 주민 30명을 포함해 총 86명이 연행됐다.(98.4.23)[1]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던 시기였다.


시간이 흘러 2000년이 되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00학번 신입생 한 명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 친구는 지역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다가 동생들도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고 1년 뒤, 부모님이 어렵게 구해주신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집들이를 하겠다며 우리들을 초대한 날, 나는 두루마리 화장지 한 팩을 손에 들고 더듬더듬 친구가 알려준 주소로 걸음을 옮겼다. 몇 번쯤 골목을 꺾어 들어갔던가, 처음 보는 풍경이 맞는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기시감은 곧 기억으로 바뀌었고 흰 눈 내리던 마을잔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친구가 살게 된 아파트는 무너진 골리앗을 밟고 세워진 '도원 삼성래미안'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으로 엉엉 울며 초인종을 눌렀고 덕분에 애먼 친구에게 죄책감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 시간 적을 두고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는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주거지뿐만 아니라 공들여 터를 닦은 가게도 땅값에 밀려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 납득하기 힘든 이런 사건들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홍대 앞 '두리반', '카페 12PM', 방화동 '카페 그', 연희동 '분더바',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 등  '젠트리피케이션'과 건물주의 횡포에 의해 쫓겨나게 된 가게에 음악가로서 연대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그렇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이 언제 어디서든 겪을 수 있는 일인 셈이다. 도시의 주인은 건물이 아니라 그 건물에서 삶을 살고 노동하는 사람이지만 우리들은 대게 그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여전히 노력이 부족하고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명제는 힘을 얻는다. 정말 우리들은, 철거민들은, 위에 나열된 가게 주인들은 노력이 부족하고 게을러서 쫓겨나게 되고 가난해지는 것인가?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이랑은 2016년에 2집의 첫 번째 수록곡 <신의 놀이>에서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라는 가사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5년이 흐른 2021년, 다시 묻는다. 우리는 '마녀'인가, '폭도'인가, '이단'인가, 혹은 '늑대'인가. 



[1]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 중, 다원건설(구적준용역) 사업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999.11. |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35)


이랑 3집 <늑대가 나타났다> 디지털 음반(좌), CD(우)

*

이랑 | https://linktr.ee/langlee

(독립음악 싱어송라이터 | 작가 | 일러스트레이터 | 영화감독)

이랑 3집 <늑대가 나타났다>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으실 수 있으며 피지컬 앨범(CD) 역시 각종 음반 판매 사이트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62호(2021년 겨울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