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Panic) 앨범 <밑> 수록곡
오래전, 혼자 살던 나는 밤이면 밤마다 낡고 뚱뚱한 TV를 켜놓고 핸드메이드 주얼리 제작에 몰입했다. 다음날이면 노점에 내다 팔 물건들이었다. 영화, 리얼리티 쇼, 다큐멘터리 등이 무한 재생되는 케이블 방송을 보다 보면 작업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밌는 시리즈물이라도 시작할 판이면 결국 피곤한 몸으로 아침을 맞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던 나는 일상이 자주 무너졌고 스스로를 점점 비하하게 되었다. 결국 깊은 고민과 굳은 결심 끝에 TV를 버렸다. 한동안은 정적이 가득한 낯선 집이 무서울 지경이었지만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잠을 자는 동안 시간은 꼬박꼬박 흘렀고 나는 이내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의 선택을 칭찬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정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 위에는 데스크톱, 태블릿 PC, 스마트 폰 등이 함께 놓여있다. 방영 시간과 상관없이 원할 때마다 다양한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고 광고를 감안한다면 무료 시청도 가능하다. 게다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듣게 되는 소위 ‘요즘’ 이슈들과 ‘요즘’ 단어들은 미디어를 거부하면 통 알아들을 수 없게 되는 게 사실이다. 나는 예전과 같은 중독증세를 보이진 않지만 점심을 챙겨 먹고 나면 동거인과 함께 1인 소파에 각각 앉아 넷플릭스, 왓챠 같은 OTT나 유튜브를 본다. 매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개 루틴처럼 그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음악가 정재형이 진행하는 유튜브 프로그램 ‘요정 재형’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1995년에 듀오 ‘패닉’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이적이 손님으로 등장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특정 음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과거의 시간에 달려갈 수 있었다.
패닉이라는 듀오가 동명의 앨범을 들고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그들의 곡 ‘왼손잡이’에 열광했었다. 몇 년 뒤 ‘반골 집단’이라는 인터넷 동호회를 만들었을 만큼 나와 친구들은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의 삶, 그 낙인에 대항하는 태도에 관심이 많았고 소위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왼손잡이’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주제곡이나 다름없었다. 패닉은 나의 예상과 달리 1집에서 가장 서정적이었던 곡 ‘달팽이’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딱 1년 뒤 그룹 이름에 꼭 어울리는 커버 아트워크가 그려진 앨범을 들고 나타났다.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시던 하굣길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나도 모르게 숨죽이게 되었던 첫 곡 ‘냄새-Intro’를 시작으로 쉴 틈 없이 이야기와 한탄, 다짐과 화, 멜랑콜리와 비아냥거림, 그리고 아름답고 날카로운 은유가 쏟아졌다. 끊김이 없이 열곡을 연달아 들으며 내적 환호성을 질렀던 것 같다. 앨범의 제목은 <밑>이었고 내가 가장 꽂힌 곡은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다.
이 노랜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한 노래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세 아들들은 광대가 죽던 날
함께 모여 밤을 새워 웃어대었다 하죠
웃으며 떠난 첫째
그 어느 날 웃으며 마을로 돌아와
세상의 모든 병들
그 모든 것 한 손에 고칠 수 있다고
수술을 할 때마다
벌려진 가슴속에 아무도 알지 못할
숨 막힌 웃음들을 하나둘씩 심어놓고
그날이 올 때마다
병이 나은 환자들은 커다란 고통 속에
웃지
<밑>을 듣기 두 달 전, 나는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 마포구 신수동에 자리했던 국민일보에서 기자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기자들이 찍어 온 사진을 다른 층의 편집자들에게 전달했고 아주 간간이 교정을 봤으며 문서 정리, 복사 등을 했다. 그해 여름, 신문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세대학교 안에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고립되어 있었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그곳의 사진들이 기자들 손을 거쳐 내 손에 쥐어졌다. 창문을 통해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헬기, 거기에서 쏟아지는 분홍색 최루액이 사진 속에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건물 꼭대기에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는 손 글씨가 붙어 있었고 최루액을 맞은 사람들의 몸에 커다란 수포가 맺혀 있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나는 몇 번인가 눈물을 훔쳤다. 퇴근길마다 신촌 오거리로 향했다. 모든 도로가 봉쇄되어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오직 사람만이 여기저기 모여 있거나 바쁜 발걸음으로 지나가곤 했다. 그렇게 신촌을 헤매다 보면 고립되어 있는 학생들을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경과 대치 중인 집회 대오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사이에 서서 밤까지 거리를 헤매다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끔찍한 사진들을 마주하게 될 신문사로 향했다.
춤추며 떠난 둘째
그 어느 날 춤추며 마을로 돌아와
세상의 모든 마을
그 모두를 한 번에 가질 수 있다고
전쟁을 할 때마다
이름 모를 젊음들 아무도 알지 못할
빛나는 총탄 속에
하나둘씩 쓰러지고
그날이 올 때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은 커다란 고통 속에
춤을
이 격렬한 충돌은 같은 또래인 학생과 전경 1천여 명의 부상과 전경 1명의 사망, 5,848명의 연행으로 이어졌다. ‘새내기’라고 불리던 내 친구들은 당일치기로 참석하려 했다가 9일간 그곳에 갇혀 있었다. 연행되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듣고 폭행을 당했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1996년 10월 9일, 서울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추미애 초선 국회의원이 직접적인 언어로 폭로하기 전까지 경찰의 끔찍한 폭력은 주목받지 못했고 언론 역시 외면했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8월 15일에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학생들의 안전 귀가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경찰은 이를 무시한 채 학교를 봉쇄하고 교내로 진입해 학생들을 몰아붙였다. 왜 정부와 경찰은 수도, 전기, 생필품과 의료 구급품까지 차단한 채 그들을 고립시켰을까? 굶주린 채 완전히 겁에 질린 20대 초반 학생들이 포승줄에 묶여 나오던 TV 화면을 잊을 수 없다. 이후 ‘범민족대회’를 이끌던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대한민국 내 이적단체 규정의 근거는 「국가보안법」이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제정·시행되었고 현재까지 모두 7차례 개정되었음에도 여전히 표현의 자유와 사상·양심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 우려가 있어 최근까지도 정치권과 시민사회 및 국제사회로부터 폐지 및 개정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광복과 전쟁을 겪었든 겪지 않았든 미군 철수와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이를 실현하게 할 이념이나 방안을 좇아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거나 고립시키는 상황이 발생할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충돌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세상과 다른 꿈을 꾼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폭도나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2009년 용산 참사 때 철거민들은 경찰과 용역들에 의해 건물에 고립됐다. 이에 저항하는 철거민들이 옥상에 망루를 짓고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정부와 경찰은 이 모습에 대해 ‘폭력적’ 이미지를 강하게 씌우고 강경 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이 참사에 대해 한나라당은 ‘반국가세력의 불법 폭력 시위’의 결과라고 말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소위 ‘색깔론’이 등장했다. 권력자들은 레임덕이나 정권 유지의 힘이 흔들리는 위기의 순간이 도래할 때마다 혐오 정치를 이용해 피해자와 유족들을 대중으로부터 분리했고 그들을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만들곤 했다. 올해로 15주기가 된 용산 참사의 피해자 가족들은 여전히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4/nwdesk/article/6564150_36515.html
울면서 떠난 셋째
그 어느 날 울면서 마을로 돌아와
세상의 모든 노래
그 모두를 한 몸에 담을 수 있다고
노래를 높이 부르는 때마다
그에 취한 사람들 아무도 알지 못할
슬픔의 외침 귓속에 남아서
하나둘씩 귀가 멀고
그날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노래 잃은 청중들은 커다란 고통 속에
울지
춤추는 광대는 서럽게 갔어도
마음은 여기 남아
해마다 그날이 되돌아올 때면
우리를 저주하네
기억해 모두 다 오늘 하루만은
광대의 춤사위를
세상의 어떠한 서러운 죽음도
그냥 잊히진 않네
처음 들었을 때도, 28년이 지난 오늘 들을 때에도 우아한 클래식 현악기 연주 뒤로 이어지는 신경질적인 꽹과리 소리와 어우러지며 뻗어 나오는 두 목소리의 힘이 마음을 강하게 울린다. 트랙 리스트 5번, 이 곡의 바로 앞에 놓인 54초짜리 ‘어릿광대’를 꼭 듣고 난 뒤, 이 곡을 들어보시길 권한다.
이적은 인터뷰를 통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1978년 처음 나온 워낙 유명한 고전이지만 지난해 작가가 세상을 떠나면서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서울, 수도권은 ‘재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폭력적으로 이뤄지는 난개발이 참 많다. 소설은 그에 밀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인간에 대한 차별, 점차 간극이 심해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
난장이는 가난할 뿐 범죄자가 아니며 광대는 웃고 있을 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에서 과연 난장이들과 광대들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광대의 죽음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기억은 힘이 세다.
https://youtu.be/N7eY1UkcZbU?si=0rdZnVOn8oZA4aQH
https://youtu.be/SpF4KZ3tezs?si=8-d7Pt9KajLIlVRF
*패닉(Pa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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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과 김진표가 결성한 대한민국의 남성 2인조 음악 그룹이다. 특유의 철학적인 가사와 함께 락처럼 공격적이면서도 시인처럼 몽환적이기도 한 분위기가 특징이며 1995년《아무도》로 데뷔한 후 《달팽이》《왼손잡이〉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 위키백과 Wikipedia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71호(2024년 여름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