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 Apr 06. 2022

[전하고 싶은 음악②] 외로운 사람들-봄여름가을겨울

- 우린, 사랑을 하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공학, 남녀합반인 중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운동장으로 내몰아 자주 뛰어놀게 했다. 나를 포함한 몇몇 여자 아이들은 남자아이들 틈에 껴서 방과 후 축구를 즐겼는데 경기가 끝나고 나면 진 팀이 돈을 걷어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성별 구분 없이 친구들과 한데 엉켜 놀았던 마지막 시절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반 분위기가 달라졌다. 겨울방학 사이 갑자기 훌쩍 커버린 애들이 있었고 생리를 시작한 애들이 있었으며 목소리가 변해버린 애들도 있었다. 우리들은 한데 섞이지 않고 갈라졌으며 모든 소문의 중심에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누구랑 누가 사귄다는 얘기가 있었다. 나 역시 어떤 아이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어졌던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기억의 왜곡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그 아이는 순정만화 주인공의 요소를 갖고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컸고 진한 눈썹과 눈매가 예뻤으며 공부를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가정에 어두운 그늘이 존재해서 우수에 찬 표정을 짓곤 했으며 모범생 같은 학교에서의 모습과 달리 당구장에 출입하는 불량한 면모까지 갖추었다. 앞장서서 수업시간을 오락시간으로 바꿔버렸고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이다가도 내 앞에서는 같이 사는 막내 이모에 대한 불평불만을 찡얼대는 귀여움을 보였다. 나의 마음을 숨기고 그 녀석의 연애상담을 해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어 다른 학교에 진학해서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겨울, 내가 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그 친구가 소개해 준 많은 음악들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봄여름가을겨울'이었고 역시 언니의 영향으로 그 밴드 음악을 자주 듣던 터라 신나게 알은체를 하며 수다 떨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이라는 앨범에 수록되었던 '외로운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이정선의 곡을 리메이크해 수록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원곡은 알지 못한 채로 이 음악을 사랑했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고독한 걸까, 우리는 누구이며 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걸까 하며 전화기 앞에 앉아 많은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개인과 가족에 대한 고민만이 아니라 현실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이 많아지던 날들이었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나누다 보면 의지가 되었다. 


거리를 거닐고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 밀려오는

외로운 파도

우리는 서로가 외로운 사람들

어쩌다 어렵게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혼자있기 싫어서

우린 사랑을 하네


어린 시절의 나는 집 안에서의 성격과 집 밖에서의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 속에도, 가족들의 기억 속에도 나는 그런 아이였다.

몇 해 전, 가족여행 중에 오사카의 어느 꼬치집에서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난 자식들 중에 너를 대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좀 무섭기도 했어."


밖에서의 나는 쾌활하고 목소리 큰 아이였다. 새로운 학년이 바뀌어도 친구들을 금방 사귀었고 대다수의 아이들과 잘 지냈다. 하지만 하교해서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과 몇 마디 안부만 나누고는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놓고는 했다. 언니와 함께 쓰는 방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고 방문을 닫고 혼자 있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무척 평화롭고 안정감 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그 순간부터 생명을 얻었다. 색연필, 크레파스, 인형, 공깃돌, 로션 통, 지우개, 빨래집게 등 뭐든지 나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이름이 생겼고 내 손에 의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어떤 날엔 그 수많은 주인공들 대신 책 한 권을 붙잡고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엉덩이를 의자에 꼭 붙이고 있었다. 또 다른 어떤 날엔 창문턱에 앉아 시시각각 변해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보면 으레 언니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는 “저녁 먹어."라고 말한다.

자,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성인이 되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혼자 있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유난히 떠들썩한 밤을 즐기다가 돌아온 어느 밤이면 이 노래를 꺼내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

만나면 행복하여도

헤어지면 다시 혼자 남은 시간이

못견디게 가슴 저리네


전태관(왼쪽)과 김종진(오른쪽) / 사진출처 노컷뉴스(https://www.nocutnews.co.kr/news/5082066)

외로운 사람들

봄여름가을겨울 3집 앨범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의 수록곡으로 이정선 8집 앨범 <Ballards>에 수록되었던 곡을 리메이크함.  

https://youtu.be/f88Y4XGH5T0

봄여름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은 김종진과 전태관으로 구성된 그룹이다. 1980년대 중반, 록 음악이 중흥할 시기에 5인조(김현식, 김종진, 전태관, 유재하, 장기호)로 결성되었으며 김현식의 3집을 서포트하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지금의 멤버로 구성된 2인조로 개편, 1집 [봄.여름.가을.겨울]을 발매해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등이 인기를 얻었고 록, 블루스, 재즈를 기반으로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2018년 전태관이 신장암으로 긴 시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김종진만 있다.

작가의 이전글 [그럼에도 우리는 ④] 우리 집 세리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