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by 홍진희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 멈추지 않는 오한, 그럼에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증, 지승은 여전히 용악산 절벽 아래였다. 기운을 차리려 감기는 눈을 애써 들어 올리며 벽에 기대어 앉아 보았지만 상체를 세우고 있어도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다. 장시간 영양을 공급하지 못한 몸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휴식 상태에 돌입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렇다한들 상관할 게 있나? 어차피 이곳에서 지승이 할 수 있는 건 해인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급격한 졸음이 밀려왔다. 부릅뜬 눈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흐릿한 지승의 시야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물체를 포착한 건. 순식간이었지만 익숙한 형체, 사람이었다. 또 사람이 떨어졌다.

입산이 금지된 용악산, 그중에서도 이 절벽에서 단순 실족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방금 떨어진 사람 역시 지승과 강우처럼 야수를 만난 게 분명했다. 처음 발견 후 외면하고 있던 로프가 다시 지승의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통화에서 해인은 억관을 만나러 가는 지승을 찾아가겠다고 했었다. 지금 아무리 떠올려봤자 해인을 통해 듣지 않는 이상 바뀐 과거를 알 수 없겠지만 해인이 지승을 찾아갈 거라는 데에 더 이상의 의심은 없었다. 지승은 죽어가고 있지만 과거의 해인은 지승을 살리기 위해 아직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결과는 비극이 거의 확실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지승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아니, 노력을 했었다. 실패할지언정 해인은 자신을 의심하는 과거의 지승을 만나 끊임없이 설득하고 구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니 지승도 이대로 비극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의 시도 역시 정해진 미래일지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 굶어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비극이었다.

죽지는 않더라도 아마 내일이면 로프를 바위에 묶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게 분명했다. 이제 두렵다고 망설이는 게 더 우스운 일 아닌가. 지승은 즉시 몸을 일으켜 배낭에 들어있던 아이젠을 신발 위에 덮어썼다. 그리고 강우가 묶여있는 바위에 또 다른 로프를 묶기 시작했다.



이 비극 속에서 장점을 찾는다는 게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고 굳이 하나 꼭 찾아내라고 한다면 절벽이 울퉁불퉁하고 경사와 굴곡이 있다는 점을 뽑아야 할 거라고 지승은 생각했다. 며칠을 사탕 몇 알로만 버텼던 몸으로 팔힘에만 의지해 로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는 건 사실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지승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믿었던 건 절벽을 이루고 있는 단단한 화강암이었다. 절벽의 경사와 화강암의 거친 표면이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몸을 지탱해 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깊이 내려온 걸까. 어둠은 방향감각은 물론 시간마저 삼켜버린 것 같았다. 절벽 경사에 디딘 발이 자꾸만 힘이 풀려 미끄러지는 걸 보니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보니 자신의 몸이 문제일 뿐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바닥에 가까이 오지 않은 이상 랜턴을 비춰보는 게 별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승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주머니에 꽂아둔 랜턴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랜턴의 한 줄기 빛으로는 짙은 어둠을 뚫고 깊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큰 기대도 없었기에 몇 번 더 주위를 살피고 전원을 끄러는 찰나 바위만 가득한 이곳의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색상의 물체가 언뜻 보였다. 황급히 다시 전원을 켜고 물체가 보였던 바닥을 비추어보았다. 밝은 색 물체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바닥이 랜턴의 약한 불빛의 가시권 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져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절벽의 바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틈이 있다면 이 절벽에서 탈출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탈출구가 없다 해도 조금 전 떨어진 사람의 신원을 파악해 해인에게 알려줄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니 조금만 버티면 된다. 하지만 지승의 두 팔과 두 다리는 이미 한계까지 힘을 끌어다 쓴 상태였다. 허무하게도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도감이 들자마자 근육이 제 기능을 하기를 거부했다. 지승의 몸은 힘없이 절벽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본능이 생존을 위해 최우선으로 삼은 건 머리를 감싸는 일이었고, 그다음은 충격에 대비해 온몸을 경직시키는 일이었다. 별 의미 없는 본능의 추락 준비와 함께 절벽의 가장 깊은 곳에 지승의 몸이 닿았다. 하지만 충격에 대비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지승에게는 아주 미미한 충격만이 전해졌다. 그 원인은 추락한 지승의 아래 있는 묵직한 무언가가 쿠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랜턴을 켜지 않아도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랜턴을 켜서 확인해야만 했다. 어둠 속에 뻗어 나온 인공적인 하얀 빛줄기가 추락한 지승의 발아래를 비추었다. 지승이 떨어진 곳은 배낭 위였다. 정확히는 배낭 주인의 시신 위. 하지만 배낭은 하나가 아니었다. 제각기 다른 날짜에 이곳에 도착했을 수십 개의 배낭이 지승의 아래 깔려있었다. 물론 배낭의 주인들도 함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누군가 지승에게 시신더미 위에서 허기를 해결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면 당연히 거절을 했을 거다. 하지만 막상 시신이 가득 쌓인 곳에 던져지니 지승은 생존을 위해 약간의 인간성과 비위, 죄책감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절벽 아래 공간은 생각보다 더 협소했다. 그리고 탈출을 할 수 있는 틈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시 강우가 있는 저 바위 위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들어오는 에너지 하나 없이 계속 힘을 쓰기만 했던 지승의 몸은 당장 저 위로 올라갈 힘이 없었다. 우선 먹어야 했다. 썩어가는 시신들 혹은 이미 백골화가 된 시신들의 배낭을 뒤져 음식을 찾아내는 건 두려우면서도 역겨운 일이었지만 먹어서 기운을 차리고 저 위로 올라가는 일이 우선이었다. 억울하게 사망한 고인들의 물건을 함부로 뒤진다는 게 꺼려졌지만 누군가는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려야 했고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승뿐이었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지승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위액을 꾸역꾸역 누르며 에너지바와 초콜릿, 과자 등을 삼켜댔다.



11시 49분. 번쩍거리는 핸드폰 불빛을 보며 지승은 자연스럽게 현재 시간을 유추했다. 처음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늘 같은 시간에 전원이 켜지는 핸드폰은 이제는 무엇보다도 감사한 존재였다.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시신더미를 뒤져 찾아낸 비상식량과 신분증들 위에 누워있던 지승은 해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바위 위로 올라오기 위해 음식을 집어삼켰지만 며칠 만에 음식을 받아들인 위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다. 바위 위에 다시 올라오자마자 위가 뒤틀리기 시작했고 애써 욱여넣은 음식은 전부 토해버렸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했으면 딱 좋겠다 싶었지만 외부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인 해인과의 통화만큼은 놓쳐서는 안 됐다.


"야수는 사냥을 쉰 적이 없어요. 여긴 야수의 도축장이에요. 놈이 절 발견하고 이쪽으로 몰아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 늘 하던 대로 익숙하게 사냥감을 몰았던 거예요. 저 아래 야수에게 사냥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버려졌는데도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요!"

누가 들어도 끔찍해할 이야기이기에 담담하게 전하고 싶었지만 결국 마지막말은 절규처럼 터져 나와 버리고 말았다. 절벽 아래에서 목격한 일들은 설명하다 보니 도축장에 갇힌 사냥감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느껴져서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가 실종된 날 용악산에 오르는 김철기를 봤다는 증언이 있었어요. 그 후로 종적을 감춰서 아빠와 함께 실종자 처리된 거고요. 그래서 경찰은 야수 현명우가 친구이자 자신을 추격하던 두 친구를 살해한 거라 결론 낸 거죠. 범인이 확정된 상태였으니 당연한 결론이었을 거예요."

해인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지승의 뇌는 바뀐 과거의 기억을 새로 받아들였다. 김철기라는 이름을 꺼내면서도 6월 29일의 지승은 해인이 믿어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해인이 그 말을 듣자마자 범인이 김철기일 거라 확신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해인은 철기의 행방을 철저히 확인해 봐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모든 게 미래의 지승과의 통화 덕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던 당시의 지승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것까지 기억을 하게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이억관 씨가 봤다던 김철기의 쌍둥이 아이들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물론 지승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해내고 있었다. 철기의 아이들을 찾아내고 용악산의 암자에 취재를 나가겠다고 말했던 6월 29일의 해인을.

"아직 살아있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살아남았으니까 과거의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린 지난 15년 동안 야수한테 사냥감 취급을 당했고 내내 지기만 했어요. 이번엔 우리가 잡아야죠. 우리가 놈을 사냥할 거예요. 그러니까 시신 더미 위에서든 아래에 깔려서든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서 버텨요."

사냥을 한다. 버틴다. 야수를 사냥하기 위해 버틴다…….

감옥보다 더 한 곳에 갇힌 지승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바뀐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뿐 실제로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해인의 말이 왠지 위로가 되었다. 야수를 사냥한다니 지금 지승의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과거의 해인, 그리고 과거의 지승이라면 가능할지 몰랐다.

"전부는 아니지만 피해자들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모아 왔어요. 아마 피해자의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한 기록이 있을 겁니다. 이걸로 경찰을 완전히 설득할 수는 없어도 의혹을 갖게 만들 수는 있을 거예요."

해인이 순규나 민하에게 실종자들의 신원을 말하고, 이들의 실종이 야수의 탓이라고 주장한들 쉽게 믿어주지는 않을 테지만, 실종자들이 용악산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면 쉽게 외면할 수도 없을 거다. 지승은 그 의혹에 희망을 걸고 싶었다. 경찰이 의혹을 품기만 한다면 적어도 야수를 긴장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지승은 이들의 신원이 야수를 사냥할 작은 계기라도 되기를 바라며 자정이 오기 전에 해인에게 실종자들의 신원을 빠르게 전달했다.



뺨을 두드리는 차가운 기운. 해인과의 통화가 끝난 후 잠이 들었던 지승은 불규칙적으로 뺨을 두드리는 한기에 눈을 떴다. 산에 오르기 전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를 얼핏 들었는데 이제 시작인 모양이었다. 조난당한 신세이기에 이전까지는 추위가 큰 걱정이었지만 절벽 아래를 다녀온 후 지승에게는 더 큰 걱정이 추가되었다. 절벽 아래 쌓여있던 고운 진흙. 랜턴을 이용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지 절벽 아래를 여기저기 살펴봤던 지승이 발견한 건 오히려 한쪽 방향에만 높이 쌓여있던 흙이었다. 그건 비가 오면 이 절벽에 물이 차오르고 흙이 쌓인 저 좁은 틈으로만 물이 천천히 빠져나간다는 걸 의미했다. 절벽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V자형의 구조였다. 장마철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면 금세 물이 차오르는 구조. 즉, 지승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 바위도 비가 오면 물이 차오를 거고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비 때문인지 익사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인지 오싹함을 느낀 지승은 강우의 시신 곁에 바짝 다가가 주저앉았다. 상대는 더 이상 체온을 나눌 수 없는 존재였지만 당장 누구에게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공포에 돌아버릴 것 같은 지승에게는 강우의 백골사체마저 의지해야 할 존재였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반대편 절벽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시야를 가린 거센 빗줄기 사이에 어떤 움직임이 보였다. 이 밤에 새라도 날아온 걸까 싶었지만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전처럼 야수에게 사냥을 당해 추락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건 영화에 가까웠다. 빗줄기를 스크린 삼아 지승을 위해 상영하는 한 편의 영화. 주인공은 영화를 보고 있는 지승 자신. 빗줄기가 지승에게 환영을 보여주고 있었다.

헛것이라기에 환영은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환영 속 지승은 현재 지승의 처지보다 더 심각했다. 강우의 백골이 옆을 지키고 있었고 아마도 해인이 분명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습은 지금과 똑같았다. 다만 빗물이 지승의 허리까지 차오른 위태로운 상태라는 게 다른 점이었다. 게다가 길게 난 수염과 더 수척해진 몰골이 마치 며칠 후의 지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왠지 묘한 기분이 들게까지 했다. 절박하게 통화를 하던 환영 속 지승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거센 비를 이기지 못한 거대한 흙더미가 지승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게 환영의 끝이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자의 정신착란으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지승은 용악산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도 더는 착각이나 정신병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환영은 지승의 미래를 보여주는 게 분명했다. 예상과 달리 지승의 죽음이 익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산사태로 흙더미에 깔리는 최후지. 어떤 식이든 최악의 결말인 건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지승은 환영 속에서 자신이 통화를 하던 핸드폰 속 날짜를 똑똑히 봐두었다. 7월 16일. 지승이 죽을 날짜였다.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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