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3년
젊은 시절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많은 부분들이 요즘 내가 느끼는 소중함과는 차이가 크다. 내 삶을 지배해온 것들을 뒤돌아 보면 아마도 일과 명예에 관련된 것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내와 공유하는 공동의 관심사는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유일한 것이 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 또한 퇴직을 하고 나니 그동안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대부분의 것들이 이제는 딱히 내게 중요한 것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아침에 맛있는 커피 한잔이 내 일상에 있어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마트에서 좋은 커피를 고르는 일이 중요할 뿐 아니라, 어디를 가던지 누구와 만나든 간에 나로 인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 만한 것이 있을까 살피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요즘, 아내와 나누는 대화의 많은 부분은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좋은 음식에 대한 것 들이다. 과거 아내와 가진 공동의 관심사가 별로 없었다면 요즘은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하고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횟수가 점차 많아져 간다. 많은 세월을 함께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삶의 공감대가 만들어지는 듯하다.
서로의 건강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요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의 관심사가 아닐까 한다.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면, 모든 관심사가 집보다는 바깥일에 있다 보니 아내가 해주던 집 반찬의 정성을 알지도 못했고, 그 정성 뒤에 숨은 노력의 고마움도 알지 못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이고 꼭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정해진 시기보다 조금 일찍 퇴직을 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서도 가능하면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퇴직을 하고 멈추어 선다는 것이 소외감, 무력감을 주기보다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인생사 중요한 것들을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이 이제야 감사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퇴직 후 내가 남긴 것들을 조용히 뒤돌아보니 강남은 고사하고 서울 어디에도 아파트 한채 소유하지 못했고 어쩌면 지방에서 벗어나 서울에 집을 산다는 것은 평생 불가능한 일이 될지 모르는 현실을 직시한다.
젊은 교수 시절 나름 열심히 연구도 하고, 열정을 가지고 훌륭한 제자를 키우고 싶었는데,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변변한 논문이나 연구 결과하나 내지 못하고 교수직을 마무리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요즘 내게 위안이 되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더불어 소중해진 것들 또한 헤아리기 어렵게 많아졌다. 퇴직 후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어느 순간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이후 예전에 몰랐던 일상의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내게 오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내게 소중한 것들.
- 바디감 깊은 콜롬비아 산 커피 원두를 고르는 일
- 프레그넌스, 아로마, 플레이버 느낌과 함께하는 아침 식탁
- 구름처럼 포근한 이불과 베개
- 따듯한 욕조 속에서 핸드폰과 함께 하는 시간
- 집 주변의 규칙적인 산책과 산행
- 아름다운 단풍이 지기 전에 소백산, 주왕산에 가야 하는 일
- 안 가본 곳의 여행을 계획하는 일
-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는 일
- 골프연습장에서 드라이버 샷의 비거리를 늘리기 위해 고민하는 일
- 내가 쓴 칼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 주변 지인들의 기쁜 소식을 듣는 일
- 넷플릭스의 화제 물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
- 아내가 만들어 주는 매일의 음식
- 텃밭에 자라는 야채
-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오늘의 날씨
- 멀리 떠나 있는 자식에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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