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8월 9일 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시계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AM 08:57....
9시가 출근시간인데, 8시 57분에 눈을 뜨다니.. 맙소사.
빛의 속도로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여운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어젯밤 이 영화를 보았지요. 많고 많은 영화 중에 왜 하필 이터널 선샤인을 골랐을까요. 주제도, 줄거리도 모르고 그냥 직관적으로 골랐던 영화... 어젯밤 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콧물을 훔치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밤새도록 꿈속에서 이터널 선샤인의 장면 장면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결과 과음을 하지도 않았고, 피곤하게 어디를 다녀온 것도 아닌데,
몸이 항상 기억하고 있는 기상시간을 어기는 월요일 아침을 맞이 하게 되었지요.
첫 장면에서부터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너무 어울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모도 성향도, 성격도 삶의 방식도 가치관도... 그런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을 지우고 나서도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화가 났습니다. 왜.. 왜... 왜.. 기억을 지웠으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가지 왜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을 하게 되는 거야.... 남편과 도저히 못살겠다고 뛰쳐나온 제 모습이 기억을 지우려고 달려 나간 조엘의 모습 같았고, 좋았던 추억들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조엘의 마음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쾅!" 찍지 못하고 주저하는 저의 속마음이 아닐까 내심 불안했습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우기 전 서로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듣게 됩니다. "너는 너무 지루해. 너는 너무 해퍼. 너는 너무 즉흥적이야. 너는 너무 무책임해." 그래서 그 둘은 사랑하기를 멈췄을까요?
"오케이. 괜찮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의 치부를 다 들여다 보고서도 다시 사랑을 시작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분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서로에 대해 그 정도 악담을 들었으면, 사랑을 그만해야지! 왜 다시 사랑을 하고 난리야! 왜!!!!
집을 뛰쳐나오고, 돈이면 벌벌 떠는 남편에게 복수하듯 자동차를 질러버리고, 애도 내팽개치고 도망쳐온 내가 '내가 너를 이렇게나 증오하고 있다.'는 마음을 그에게 다 까발려 버렸고, 나아가 인터넷 동네방네 수만 명에게 내 감정을 노출해 버렸는데도, "오케이 괜찮아"...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하게 될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밤새도록 꿈속에서 "이건 아니야! 영원한 햇빛? 안돼! 아니야!!!! 안돼!!!!! 필명 리스트에서 선샤인은 지워버리겠어! "를 외치다 결국 지각을 했지요.
아침에는 그저 이 영화가 권태기에 지친 연인들이 지난 사랑의 열정과 추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퇴근 후 다시 조용히 영화의 장면 장면을 되시기다 깜짝 놀랐습니다. 영화가 던지고 있는 주제는 [지난 간 사랑의 소중함과 빛나는 시간, 열정과 아름다움]이 아니었어요! 영화의 제목은 [이터널 선샤인]이지만, 영화가 던져주는 깊은 주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입니다.
어쩐지 영화 내내 [메리]의 눈빛과 표정이 자꾸 시선에 잡히고 걸리더라고요. 이영화의 키맨은 [메리]였어요. 기억을 지우는 일을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던 메리는 본인의 기억도 지움 당했다는 걸 알고, 고객들에게 그들의 기억을 돌려주는 일을 합니다. 영화는 피하고 싶은 진실을 회피해 버렸을 때 또다시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며 한 인간 안에 프로그래밍된 기억과 행동습관에 따라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사실을 이야기해줍니다.
저는 오늘 한 가지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내가 그동안 피해왔던 진실, 나의 행동 패턴, 기억을 지우더라도 다시 하고야 말 선택들.. 그것들을 마주하고 이겨나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릴 대로 질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 제가 어쩌면 기억을 지우는 '회피'의 방법을 선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게 이혼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혼을 한다면 완전히 그를 끊어내는 멋진 결정을 하는 것이고, 이혼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그에게 이끌려 다니며 나를 잊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더 용기 있는 결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속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 만 같았지요. 더 이상 상대를 미워하거나 애달아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러나 기억을 지우고 나서도, ‘조엘과 클레멘타인’, ‘메리와 하워드’의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회피하거나 잊어버리기를 선택하게 되면 결국 다시 똑같은 판단과 결과를 가져온다는 결론입니다.
마음속 오래된 경험의 기억의 결과가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오래된 경험과 기억을 제대로 알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그 상처를 대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질문은 "나는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 가 아니라 "나는 우리의 문제를 대면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로 옮겨져야 합니다. 내가 그를 다시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면, 나는 다시 포용하고 배려하고 헌신하고 이해하려고 들 것입니다. 지금 내 인생에서 "사랑"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겠습니다. 타인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먼저일 것은 그 사랑을 실천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부터입니다. 나의 욕구와 바람, 나의 생각과 가치관 그것들을 올바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자의 욕구와 어떻게 잘 조율해 나갈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43살 뒤늦게 이 스텝을 밟아나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