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인생은 시간, 상황, 상황 대처의 함수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비슷한 상황에 대한 경험이 다채로워짐은 물론이요 돌발 상황도 자주 맞닥뜨리게 되어 웬만한 일에는 적절히 꺼내 쓸만한 데이터를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른이 된 아직도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다.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도 괜찮다 카드는 대체 어떤 때 꺼내야 하는 걸까?
PT를 한 지 2개월 차가 되었다. 그러나 살이 오히려 1kg 쪘고 체지방은 별다른 변동이 없다. 나는 어느 날은 8시에 쓰러져 자고 어느 날은 새벽 3시에 자기, 밤에 불 켜고 자기, 스트레스나 불안을 먹는 걸로 푸는 습관에 찌들어서 그런지 논문에 신경을 바짝 쓰던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약 7kg이 쪘다. 계속해서 살이 찌고 있어서 억지로라도 관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헬스장에서 개인 트레이너에게 운동 강습을 받기로 했다.
트레이너님은 처음에 내게 식단관리를 시작할 시기를 스스로 정하라고 하셨다. 나는 '해야지' 말을 되뇌고 사실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닭가슴살, 사과 반 알, 고구마를 먹으라기에 이들을 사서 먹었지만 정량을 넘겨서 먹었고, 운동을 시작했으나 일주일에 두 번 PT 약속이 있을 때만 갔다. 일을 하고 와서 바로 누워 자던 3월의 일상에서 한 걸음 나아갔고 살이 더 찌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고, 4월은 시험문제 출제 등으로 일이 힘들고 잠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괜찮다고 여겼다.
"회원님 PT 힐 때 말고 운동 몇 번 오세요? 식단도 지키고 있으세요? 올 때마다 부어있는 거, 운동을 꽤 잘 따라오는데도 그 이상은 안 하는 거 보면 솔직히 좀 답답해요."
말씀을 듣고 당신과 나의 열심의 기준이 다르고, 내겐 4월에 운동을 나온 것만도 장족의 발전이다 싶었다. 나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봐주시고 어떻게 해야 시간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해주시는데, 배우는 입장에서 내가 너무 안일했다 싶기도 했다. 나는 내일부터 매일 운동하러 나오고 식단도 따르면서 열심히 해보겠다고 트레이너님과 약속했다.
운동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내가 너무 많은 일에 '이 정도도 괜찮다' 카드를 꺼내 들었던 건지, 이렇게 결정적인 때를 놓친 적이 또 있는지 반성했다. 20대 초중반까지는 뭐든 치열하게, 최선을 아니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보다 조금 더 열심히 했다. 그러나 오랜 고시공부 끝에 병명도 의사 선생님마다 제각각이며 딱히 치료약도 없는 듯하다는 피부병,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앓고, 시험 불안이 조절되지 않아서 몸이 굳고 과호흡 증상이 나타난 적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무언가를 하기 전에 "지속가능성"과 "예상 가능한 위기"를 먼저 따져보는 습관과 뭐든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7,80%만 쓰려고 드는 태도가 남았다. 어쩌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라는 말이 유행이던 때에서 쉬어가도 괜찮다는 책과 강연이 넘쳐나는 사회로 넘어오며 자연스레 그 유행을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에 나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약간의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이었고 많은 부분 공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마음 한편에서 혹시나 내가 스트레스 관리에 실패해서 스트레스가 신체화되는 증상을 겪거나 더 빨리 가려다가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생길까 봐 여전히 두렵다.
운동은, 전문가의 뜻에 따라 더욱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서 식단 관리와 함께 성실하게 임해도 될 것 같다. 전문가가 그렇게 해도 소진될 일 없다는 것을 나의 역량에 맞춰 점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에너지까지 투자할 수 있으며 어느 수준의 스트레스까지 내가 견뎌낼 수 있을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내가 나의 사정과 일의 흐름을 가장 잘 알고서 언제 '좀 더!!'를 외치고, 언제 '이 정도고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위로해줘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여야 하는데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을 적정 수준까지 해내는 데에도 사실 조금은 버거운데, 이 상황에서 '이 정도도 괜찮아' 카드를 꺼내자니 카드를 너무 남발하다 적당 적당히 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릴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이 정도도 괜찮아' 카드는 언제, 어떨 때, 얼마나 꺼내야 정말 괜찮은 걸까? 경력이 쌓이면 정말 일에 쫓기지 않고 내가 일을 지배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될까? 옆에 공부나 운동처럼 내 일, 내 인생을 코치해 줄 사람이 없는데,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성능도 우수해지고 출력도 좋아지겠더니 낙관해도 되는 걸까? 아직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내겐 나의 강점과 약점, 일의 특성을 파악하고 스트레스를 조절해나갈 능력이 있으니 계발만 하면 될 거라는 생각, 그 계발 방법이란 건 어떻게 생겨먹은 거냐는 물음이 또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