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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Jun 11. 2021

외할머니를 보내드리며

2021년 6월 10일, 외할머니께서 작고하셨다.

나에게는 가족의 죽음이 태어나서 처음이다.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내 세상 한 조각이 사라져 온 세상이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면서 아이고 아이고 통곡할 줄 알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나지도,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백지장이 되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몸을 어찌 움직여야 할지 잊어버린 사람이 된 느낌을 받고서 한동안 그저 멍하게 앉아있었다. 일단 계획했던 대로 운동하러 나가서 자전거 바퀴를 휘적휘적 돌리다가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밤식빵을 하나 사서 집에 들어왔다. 밤식빵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한 뒤, 어릴 적 할머니께서 그러하셨듯 영수증을 꼼꼼히 받아서 챙겼다. 그렇게 식빵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할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름 돌아가듯 촤르르 떠올랐고, 책상 앞에 앉아 눈에 고인 눈물이 알아서 흘러내리는 걸 잠시 내버려 두었다.



나의 유년시절, 그러니까 당뇨를 지병으로 앓기 전의 할머니는 떡보다 을 좋아하셨고 그중에서도 밤식빵을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터는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고 할 때면 엄마와 함께 자주 가던 빵집에서 늘 밤식빵을 사다가 포장지의 각을 세워 식탁 위에 올려놨었다. 종종 하굣길에 밤식빵을 사 가기도 했는데, 그런 내가 대견해서였는지 정말 밤식빵이 좋으셔서였는지 둘 다였는지 모르겠지만 사랑 표현이 잦지 않은 할머니가 '내 주려고 산 기가'하며 코 평수를 확장하며 감출 듯 말 듯 웃으시며 '맛있네~' 하시던 모습에 뿌듯하던 마음을 잊지 못한다.


 스카치 캔디, 바이오 캔디, 짱구, 새우깡도 할머니께서 쟁여놓고 드시던 간식이었다. 할머니 댁에 있던 서랍을 열면 쫌쫌 짜맨 짱구 과자와 스카치 캔디, 바이오 캔디 등이 늘 들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 댁에만 가면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편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좋아서, 그런 엄마를 좋아하는 나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할머니가 좋아서, 할머니께서 엄마가 갈 때마다 요구르트 기계로 만들어서 끓여주셨던 청국장이 좋아서, 청국장과 늘 같이 내어주셨던 육개장이 맛있다며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두 그릇씩 먹는 아빠의 모습이 재밌어서,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서 두 손의 토닥임을 받으면서 잘 수 있어서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쥐색의 4인승 현대차를 타고 울산에 있던 아파트에서 대구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출발해서 들뜬 마음으로 선물을 사고,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를 넉넉히 사서 남겨가 할머니를 드리고, 할머니 댁에 있는 자개장을 홀린 듯 구경하고, 청국장을 뜨는 할머니와 엄마 옆을 서성이고, 엄마를 속 썩이면 안 된다며 당부하며 아껴 드시던 짱구 봉지를 선뜻 열어 과자를 나눠주시면 짱구 하나도 입에 비해 큰 나머지 소리가 다 새서 '에~!' 하며 대답을 했더랬다. 건성으로, 과자에 대한 조건반사처럼 한 대답이지만 적어도 할머니 댁에 머무는 동안에는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으려고 어나랄 때 잘 일어나고, 자랄 때 투정 부리지 않고 잘 자고, 양치도 떼쓰지 않고 잘하려고 했었다.



유년시절의 할머니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 시대의 모성애 대표주자라면, 내가 10대부터 봐 온 할머니는 대학교 사회학 교과서에 대표 예시로 소개될 법한 재산은 아들 다 내어주고 딸들의 효도를 바라시다가 경증 치매로 등 떠밀리듯 들어간 요양 병원에 들어갔고, '노환'에 '호상'이란 단어로 말년이 미화된 분이시다. 자식을, 손주들을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이지만 으레 부모-자식 관계가 그렇듯 준 만큼 돌려받지는 못하고 돌아가신 셈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지방 유지셨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유언장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은 아들이었던 외삼촌이 관리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사시던 5층짜리 아파트도 외삼촌인지 외숙모의 명의였고, 그 5층 아파트가 재개발을 하자 할머니는 다른 5층 아파트의 5층으로 이사를 가셨다. 이모들은 무릎이 안 좋은 할머니가 5층 계단을 어떻게 오르내리냐며 몇 년 동안 외삼촌에게 항의를 했지만, 이보다 더 큰돈을 쓸 수 없다며 지역유지들만 가입하는 무슨 클럽 회원인 외삼촌네는 할머니를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옮겨드리는 것을 반대하셨다. 나는 아직도 중산층이라기에는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살기 바쁘고, 아직도 주택자금 대출을 갚고 있는 우리 부모님에 비해 큰 부를 이루고도 자수성가했다고 외치며 할머니께 쓰는 돈을 지독하게 아끼는 외삼촌네가 야속했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재산을 몰빵 해서 가져가서  효도라도 짱짱하게 해 줄 것이지. 그리고 무릎이 아파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다는 얘기, 교회에서 약장수에게 사기를 당하고도 도리어 돈을 물어주게 생긴 일 수습을 우리 엄마와 막내 이모에게 맡기는 할머니가 야속했다. 돈 준 데다 해달라지, 이럴 때만 딸 이래?!

그러나 이도 지나고 보니 그저 남자가 집안의 가장이고, 재산은 아들에게 주는 것이 맞으며, 할머니 자신의 일은 집안의 큰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탓이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한 탓은 아니었다 싶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머리가 크고 나서는 할머니의 젊은 날, 내가 어린 시절에 자식들에게 베풀어주셨던 큰 사랑은 잊은 채 자주 우리 엄마에게 준 것 없으면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분으로 여겼던 것 같아 죄송스럽다. 그 무엇도 할머니 탓인 것은 없을 터인데, 누구도 부족함 없이 사랑했고 늘 퍼주려고 했던 할머니는 그저 아들이 최고인 세상에 순응하고 살았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싶다.


엄마는 휴가를 내고도 장례식장이 있는 대구로 바로 향하지 못한 채 집에서 황망히 울고 있는 딸에게 할머니는 왕비같이 고운 옷을 입고 관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업데이트된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더 늦으면 평생토록 가만히 울고만 있었던 나를 원망할 것 같아 검은 옷을 챙겨 입고 발걸음을 더디 옮겨 기차를 탔다. 나에게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주고 간 사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엄마의 엄마, 세상에 멋있게 반기를 들지는 못했어도 세상에 해 끼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식의 삶을 꾸려주고 자신의 삶을 호상으로 포장해주고 간 여자. 나는 그런 외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글로 정리하고 이제 보내드리려 한다. 좋은 곳에 가셔서 건강하게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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