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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Jul 11. 2021

[한여름 밤의 백일장]존버: 선 존중 후 버티기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고

"너 그렇게 K-pop 많이 듣다간 찬우쌤처럼 된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외워야 하는 과학 지식을 좀 더 재밌게 익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K-pop을 과학 버전으로 개사해서 불러주거나 해석해주곤 . 재밌어하긴 했지만 어느새 나는 '케이팝 너무 좋아하다간 찬우쌤처럼 된다'의 찬우쌤이 되어 있었다. 저런 맥락이라면 당연히 아주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 것 터. 나이가 들어서도 K-pop의 늪에 허우적 대고 있을 거란 뜻임을 알면서도 왠지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 삶이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내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며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며칠 동안  마음 한 구석이 쓸쓸했다.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는데. 


사실 10대의 내가 생각했던 서른 살의 나와 실제 서른이 된 나는 많이 다르다. 는 내가 서른 즈음이면 부와 명예를 가졌거나, 그걸 아직 갖지 못했어도 내 곁으로 오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미디어에서 평범하다고 이야기하는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뒤늦게 깨닫고, 내려놓는 것과 포기하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출석부와 자료 정리를 꼼꼼하고 정확하게 다시 해달라는 말에 고개 숙였던 불안정한 어른이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나처럼 현재가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과거에 미련이 있는 주인공 죽기 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0시에 열려있는 도서관에 가서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아보는 여정을 그린다.


과거를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삶에 만족할 수 있다

이 책은 존중하며 버티기: 존버에서 '존'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해라, 버티다 보면 빛을 본다고들 하지만, 책에서 노라가 말했듯 사람이 우울한 이유는 우울함을 만드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라가 많은 삶에서 탈출(?)했던 이유들의 공통점은 절친이나 사랑하는 오빠 조가 세상에 없어서, 그리고 삶을 연기하는 데 지쳐서이다. 새로운 세상에 이전 세상을 살던 노라가 '방문'하다 보니 새로운 세상에서 살던 노라의 과거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 삶을 살아야 했고, 노라는 그것을 "연기를 하는 기분"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노라는 자신이 추측한 새로운 삶에서 노라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현재의 일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지나치게 노력하고 애쓰는 삶에서는 뇌에 과부하가 걸리고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당연히 뇌는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구나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통해 에너지 소비량을 점차 줄여나가지 않는 한 그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삶을 연기하는 기분이 들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라의 경우에는 우울하다고 생각했던 현재를 다시 살아갈 때 가장 편안한 모습이었다. 라가 어떤  상상을 통해 그 삶을 방문하든 돌아오는 까닭에는 자신이 원했다고 생각했던 삶에 대한 실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 실망의 원인은 성공한 올림픽 수영 메달리스트이고 몸이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지만 사랑하는 오빠가 이미 곁에 없다는 사실, 호주의 해변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친구가 죽었다는 점, 자상한 남편과 사랑하는 딸을 만났지만 남편과 딸에게 자꾸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점 등으로 묘사가 된다. 누구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자신을 넘치도록 아껴주는 사람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돌려주지 못하면 조금이라도 짐스러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나 그렇다고 우울함이 가득한 삶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나는 노라가 상상했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 단지 방문하기만 했던 이유가 노라가 그 삶을 살아간 노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노라는 그 삶을 살아온 노라의 과거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그것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늘 연기하듯, 그리고 들키지 않게 어물쩍 넘어가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애쉬와 함께한 삶에서는 긴장을 늦출수록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몇 개월이나 지난 뒤였고 딸의 이름도, 남편의 직업도, 자신의 직업도 모른 채 새로운 삶에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일은 정말 버거웠을 것이다. 나는 노라가 상상한 삶 속 노라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그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큰 구멍이라고 생각했다. 독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삶에서의 노라가 어떤 사람인지 주인공의 대화와 행동, 추리를 따라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뇌는 짧은 스릴과 긴 편안함을 추구하는 기관이지 않나. 노라가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다고 느낀 우울의 늪으로 결국 돌아간 까닭은 어쩌면 새로운 삶의 노라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추리해야 하는 피로감과 새 삶의 노라가 한 의외의 선택이 부른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탓일지 모른다. 결국 노라는 새 삶에서 노라가 한 선택을 존중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후회와 미련이 생겼기 때문에 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존중 후 버티기

노라는 살아 보고픈 삶을 상상하라는 엘름 부인(사서)의 말에 댄과 작은 펍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올림픽 수영 선수나 빙하 연구원이 되었다가 그 무엇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 팔랑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가 아니란 생각에 음악을 하는 삶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 삶에서도 다시 나와 방황하다가 결국 현재의 우울했던 삶으로 돌아와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에 감사하며 내일을 꾸려간다.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감사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존중하기로 결심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보았다.

요즘 대세 재재PD는 유퀴즈에서 취준시기를 존중하며 버텼다고 말했다. 나는 죽도록 버틴다는 것보다 이 해석이 더 맘에 들고, 이 책의 메시지와도 잘 맞다고 본다.

결국 작가는 여러 삶을 떠돌다 결국 노라 자신일 수 있는 삶으로 돌아오는 플롯을 통해, 현재는 과거의 내가 쌓아온 선택의 결과물이고, 그것이 후회가 되는 부분이 있을 지라도 미련에 매몰되지 말고 능성을 채워나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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