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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Jun 18. 2021

신조어, 그들만의 세계

<이오덕의 글쓰기>를 읽고

내또출, 꾸꾸꾸, 좋댓구알, 군싹, 오저치고, 주불, 삼귀다, 레게노... 


외계어도 아니고 외국어도 아니고 한글이지만 한글 같지 않은 말이 넘쳐난다. 신조어를 검색하는 일이 많아지니 사전 찾듯 검색하는 경우도 있고, 각종 동영상에는 신조어 퀴즈를 흥미롭게 다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듯 신조어와 관련된 영상이나 글을 접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

처음에는 '요즘은 이런 신조어를 쓰는구나' 싶어 신기하다가, 개수가 많아지고 별별 말이 다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굳이 이렇게 만들어야 하나, 그냥 쓰는 게 의미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텐데...' 하며 꼰대 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신조어 사용은 최근에 생긴 이슈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pc로 채팅을 하던 시절에도 이런 신조어는 있었다. 그때 어른들도 채팅 용어를 써대는 우리를 보면서 혀를 차고 싫은 기색을 보였다. 


"하이루"

"방가방가"

"이 놈아! 세종대왕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다!!!"





일 년 넘게 글을 쓰면서 이제는 질적으로 성장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은 좀 더 간결하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감성은 담고 감정을 덜어내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연습하는 중이다. 


<이오덕의 글쓰기>를 추천받아 며칠간 읽었다. 먼저 접한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에 비해 쉽게 책장을 넘길 수는 있었지만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잠깐 책과 저자의 시대적 배경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은이는 1925년생이다. 필자를 기준으로 하면 할아버지뻘, 우리 아이들을 기준으로 하면 증조할아버지뻘인 셈이다. 1944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해 1986년까지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판이 1993년에 나왔으니 80년생인 내가 교육받던 시기에 쓴 책이긴 하지만 실제 자료가 되는 배경과 글은 좀 더 이전 세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 내용에 끄덕이면서 읽었다. 잊고 있었던 반공 포스터(공산당이 싫어요! 이런 문구를 사용했다.)도 생각나고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 편지도 떠올랐다. 학교에서 내 준 동시 짓기 숙제를 엄마와 상의하며 적었던 기억과 선생님 칭찬을 받으려고 꾸며낸 착한 일, 착한 생각도 끄집어냈다. 

일제강점기 교육 흔적이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단 생각도 들고, 지금이라고 뭐가 크게 달라졌을까 싶기도 해서 마음이 제법 복잡했다.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면 책에서 말한 '어른의 글쓰기를 흉내 내고' '교훈을 담고' '밝고 긍정적인' '나라에 보탬이 되는' 글쓰기를 강요당하기는 했지만 책에서 그려지는 교육 환경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한 뼘쯤 옅었던 때로 기억한다. 

이는 이미 지난 시간이기에 기억이 아름답게 포장되었거나 어른이 되면서 처음을 착각했을 확률도 있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걱정한 글쓰기 교육을 문제삼지 않을 정도는 절대 아니다. 


© ivalex, 출처 Unsplash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 솔직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잃어버렸다면 바르게 인도하는 것도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도 짚는다.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다. 곧,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것이다. 글을 쓸거리를 찾고 정하는 단계에서, 쓸거리를 생각하고 정리하는 가운데서, 실지로 글을 쓰면서, 쓴 것을 고치고 비판하고 감상하는 과정에서 삶과 생각을 키워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오덕의 글쓰기> 중


이 부분이 이 책을 쓴 이유이고 목표하는 곳을 정확히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책을 추천한 이는 아마도 아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글쓰기가 삶을 가꾸고 생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추천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모든 장이 좋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특히 마지막 장이 좋았다. 책 끝부분에는 아이들과 저자가 쓴 글을 비판한 글을 가지고 잘못된 비판인 이유와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바로잡는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여론 몰이, 악마의 편집, 세뇌와 같은 단어가 연관검색어처럼 떠올랐다. 

모두가 교육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부모님 세대가 그랬고 할아버지 세대는 더 심했다. 그 시절에 배운 사람이라 불리는 부류가 이런 식의 비판글을 쓰면 걸러 듣는 힘이 없는 대중은 그들처럼 생각해야만 한다고,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까 저 말이 정답이라고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긴, 모두가 교육받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분위기에 휘둘리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또한 한글로 쓴 글을 굳이 한자로 바꿔 쓰면서 비판한 상황을 꼬집으며 꼭 어렵게 한자로 바꿔가면서 까지 글을 써야하는 것인지 묻는다. 말글만으로도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충분히 아름다운 표현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나 역시 신문이나 오래된 책은 한자를 몰라서 읽을 수 없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책이나 신문에서 한자가 보이지 않은 것도 얼만되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한자를 사용하던 이들이 상류층인 시대가 끝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여기에서 아이들이 쓰는 신조어가 생각났다. 먼저 밝혀두지만 나는 좋은 우리말을 그렇게 줄이는 이유를 지금도 앞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을 테고, 신조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변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 옛날 식자층이라 불리던 이들이 거들먹거리며 유식(?)함을 뽐내고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고자 사용한 한자와 같은 선에 놓고 보면 과연 이 현상이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현상인 건지 의문스럽기는 하다. 아이들은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탄압받지 않으면서) 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껏 솔직해도 되는 아이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마음과 어른들이 주입하는 모든 교육과 잔소리로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 신조어가 아니었을까?


끝으로 덧붙이자면 필자는 고향이 대구이고 일가친척이 모두 경상도로 흩어져 있었기에 다양한 경상도 사투리를 듣고 자랐다. 덕분에 책 속에 나오는 사투리 말글을 해석 없이도 이해하고 말글이 가진 억양과 뉘앙스를 완전히 알아볼 있었다. 하지만 사투리를 모르는 남편이 읽었다면 해석을 보고도 갸우뚱할 수 있겠다 싶다. 사투리 말글이 아름답고 지켜져야 한다 말하는 저자의 의견에 매우 동의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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