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간 고향을 떠나 타국에 무국적자로 남아 우리말까지 잊어버린 할머니
일제시대때 정신대로 나가서 동남아를 떠돌다가 결국 캄보디아에 정착한 할머니가 비록 우리말은 잊었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결코 잊을 수 없었서 가족과 고향을 찾았던 할머니의 얘기가 20년전에 한참동안 방송되고 있었을 때, 나는 이 할머니 보다 먼저 9년전에 마카오에서 만났던 박 경애 할머니를 떠올리며 글을 올린다.
지금부터 30여년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여행자유화가 실시되어 평범한 여자인 나도 중국 대륙을 여행하고 싶어서 혼자 배낭을 매고 떠났다. 마침 그때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중국 당국이 외국인의 여행을 허락하지않았지만, 내 생각으로는 홍콩이나 마카오에 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중국 대륙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홍콩의 여행사에서는 천안문 사태로 중국여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마카오로 들어갔다. 마카오의 여행사에서도 똑같은 말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체념할 내가 아니었다. 일단 나는 쭈하이(珠海)로 들어가는 마카오의 관문인 꽌짜까지 가서 중국 여행객틈에 살짝 끼어들어가 몇 개의 관문을 통과했으나, 마지막 관문에서 인텔리다운 멋진 스타일의 중국 공산당 관리를 넋놓고 쳐다보는 바람에(당시 공산당 관리라고 하면, 머리에 뿔이 난 괴물로 알고있었을 때였으니까) 들통이 나서 결국은 중국 대륙을 여행하지못하고 그냥 마카오의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까지 우리들이 배운 지식은 공산당하면, 전부다 빨간색에 혹이 달린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박혀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관리가 너무나 신기했다. 그날 실망하여 숙소로 돌아온 나를 위로해주시던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으로부터 한가지 부탁을 받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서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이 돌보시는 어떤 할머니가 계시는데 그 할머니는 무국적자로 자신의 언어와 이름과 고향과 가족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대강의 연세는 당시 78세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시며 내게 그 할머니의 북한 여권 사본만을 전해주고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대한민국 적십자사에 부탁하거나, 조선일보 팔면경 같은 곳에 사연을 보내서 이 할머니의 뿌리를 꼭 찾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한강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는 일을 내게 부탁하신 것이다.
여권 사본에 나와있는 이름은 박정희, 생년월일은 1919년생, 고향은 경북 연일군(지금의 포항지역)으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박경애 할머니는 고향이 지금의 포항 부근으로 할머니의 나이 15세때 일제의 정신대징발을 피해서 동네 처녀들과 함께 만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도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곳이어서 이 할머니는 이곳에 정착을 못하고 상해(上海)로 내려와서 살던중에 마침 그곳에서 국제 무역을 하고 있던 어떤 필리핀 남자를 만나 상해에 정착하였다. 그런데 그 필리핀 남편은 얼마 있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두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마침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무국적자인 박경애 할머니는 상해를 떠날 수 밖에 없어서 마침내 마카오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다시 혼자 된 할머니는 그 당시 혼란했던 마카오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해가며 하루하루를 버터가던 1960년경, 무국적자는 당장 추방해버린다는 마카오 당국의 얘기를 듣고 숨도 크게 못쉬던 이 할머니에게 북한 당국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북한 여권을 발급해주었다. 1960년경 당시에 북한은 우리나라보다 GNP에서 앞서 있었으며, 지금보다는 전력사정이나 식량사정이 훨씬 좋았다 한다. 그러나 일단 북한 여권을 받아든 할머니에게는 오히려 대한민국으로 올 수 있는 길이 영영 막혀버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혼란한 세상을 힘들게 버텨오던 할머니는 한곳에 정주하지못하고 떠돌면서 살다보니 그만 우리 말을 잊어버렸다. 우리말 조금, 중국 표준어 조금, 영어 조금, 중국 광동어 조금씩만을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언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못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주변사람들에게 "우리 어머니 姓은 밭 田자이구, 내 동생 이름은 박 경호야”라고 하였다. 박 할머니는 힘들게 살아오는 와중에도 자기가 업어길렀던 동생 이름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적십자사에 연락하여 박 할머니의 여권 사본을 보여주며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적십자사는 그 여권 사본에 적혀있는 경북 연일군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회의적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마카오에 있는 수사님으로부터 독촉하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미 연세도 많아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만 확인되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며, 그렇게만 되면, 한국의 양로원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며 빨리 가족을 찾아주기를 독촉하였다. 편지를 받고나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로 적십자사의 송선생님에게 연락하여 당장 내가 포항시청으로 가서 호적을 열람해볼터이니 협력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송선생님은 포항시청에 우리 적십자사 직원이 내려가니 협력해주라고 요청해놓았다. 나는 갑자기 적십자사 직원이 되어 그날밤 포항으로 내려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가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침 9시에 포항시청에 도착하여 호적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호적은 200년간 보존된다고 한다. 열람한지 30분쯤 되었을 때 마침내 단서를 찾아냈다. 1919년 당시 박씨 성을 가진 그 지역의 사람이 약 105명 정도 되었다. 박씨 성을 가진 호주들을 일일이 열람하던중에 마침내 할머니 어머니의 성과 비슷한 어느 가족의 호적을 찾아내었는데 박 할머니의 호적이 틀림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할머니의 어머니 성은 밭 田이 아니라 鄭이었고, 전체 이름은 鄭田慕였다. 그 할머니는 자기 어머니의 이름 첫글자를 성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단서는 박 경호라고 늘 입에 올리던 그 할머니의 동생 이름이 이 할머니 호적 바로 밑에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업어 길렀던 남동생의 이름은 잊어버리지않고 주변사람들에게 내 남동생 이름은 박경호라고 말해왔다. 이 할머니의 이름도 여권에 나와있는 박 정희가 아니라 박 경애였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당장 마카오로 국제전화를 하니, 그 수사님도 무척 기뻐하셨다. 호적등본을 그 자리에서 마카오로 등기 속달로 부쳤다. 또한 포항시청측이 즉석에서 경찰서로 신원을 의뢰하니 마침 그 할머니가 항상 꿈에 그리던 남동생 박 경호의 부인이 여전히 포항에 살고 있다했다. 경찰서에서 조회한지 1시간도 지나지않아 박 경호씨의 부인이 식당에서 일하다말고 자기 아들과 함께 눈이 휘둥그래져서 자기집의 족보를 휴대하고 시청안으로 들어왔다. 그 부인의 말로는 자기가 시집올 때 시부모로부터 손위의 시누이 박경애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전염병을 앓다 죽었다고만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 할머니의 동생이자 자신의 남편 박 경호는 수년전에 세상을 떴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밝혀졌다. 이제 박 할머니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정부의 사정은 우리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만약 박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박경애 할머니와 비슷한 사연을 안고 사할린이나 중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도 너도나도 한국으로 들어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부 부담이 클 것이라고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적인 차원에서 박경애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박경애 할머니는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않았다. 이유는 캄보디아로 돌아간 할머니와 같다. 이미 한국말을 잊어버렸고, 음식과 기후와 습관이 맞지않을 것이기에 그냥 마카오 양로원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 하셨다한다. 3년후 할머니는 한많은 세상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임종 전에 자신의 뿌리를 찾음으로써 소원을 풀고 돌아가셨다. 호적을 찾아드린 다음해에 동생 박경호의 큰아들 그러니까 할머니의 장조카가 고모를 만나기 위해서 마카오를 방문하여 만났다고 한다.
1990년대말부터 사할린 동포가 고국에 영구 귀국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박 할머니와 같은 사정으로 중국이나 구소련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남은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