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이 종종 퍼즐 같다고 생각해. 쓰러진 물컵 속에서 본 절망, 참다가 터져 버린 눈물,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도 모두 내 인생의 조각이야.
사람의 기억이 퍼즐과 같다면, 엄마들의 퍼즐은 조금씩 닮은 데가 있다.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탈 때, 작은 무대 위에 올랐을 때, 자신의 세계를 색색깔의 그림으로 표현했을 때를 한 조각씩은 가지고 있다. 다람쥐도 아니면서 도토리는 덮어놓고 좋아하는 아이 때문에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면 가을보다도 아이 생각이 나는 사람들이 엄마들이다. 그래서 그림책의 표지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얘기이거나, 엄마에 대한 얘기일 것이라고. 울엄마 집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책장과 티비 선반에 내 사진과 어린이들 사진이 골고루 놓여 있다. 나는 늙어가고 어린이들은 커 가는데, 엄마 집에 사는 우리 가족은 나이 먹을 줄을 모른다.
어떤 조각은 사라지고, 어떤 조각은 닳고, 어떤 조각은, 이어진다.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딸은 사라진 엄마를 찾아 헤매다 노란 버스를 기다리는 자리에서 엄마를 발견한다. 엄마에게 가장 오래되고 소중한 퍼즐 한 조각이, 유치원에 다녀오는 딸을 기다리던 그 순간이었나 보다. 울 엄마가 가장 깊은 곳에 새겨둔 퍼즐 조각이 뭘까 생각해 보니 '도시락'이 아닐까 싶다. '엄마의 도시락' 하면 내가 또 할 말이 많다. 도시락을 싸야 했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엄마는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들고 교문 앞에 있었는데, 나는 그게 감사한 일인 줄 알면서도 마음껏 감사할 수가 없었다. 거동 불편한 외할매를 간호하느라 밤에 일하고, 오전까지도 겨우 쪽잠 자는 중이었을 턴데, 풀로 붙인 듯한 눈을 떠서 도시락을 싸왔으니, 나로선 감사보다 부담이 더 클 수밖에.
그렇다고 반찬이 뚜껑 열기를 설레게 할 만한 것이었냐 하면, 당연히 그렇지가 못했다. 감사는커녕 반찬투정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서, 내 마음은 이중 삼중으로 불편했었는데.
그새 오래전 일이 됐다. 나는 요즘 학교 급식 대신 도시락을 먹는다. 아침마다 엄마가 싸 주신다. 반찬을 뭐 넣지? 하는 고민을 야무지게 하나 더 얹어줬지만,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흔 넘은 딸을 위해 도시락을 싸야 하는 엄마는 '그때 못 챙겨준 도시락을 지금 챙겨줄게'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중이고, 나는 엄마의 시간을 되돌리진 못하더라도 엄마만의 후회를 조금씩 지울 수 있도록 돕는 중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결론은 효년이다.)
세월은 가차 없는 놈이라 언젠가 엄마의 기억들도 많이 닳고 사라지겠지만, 어떤 기억은 나와 이어져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또 어떤 기억은 '퍼즐'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수채화가 되어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그때의 우리를 위로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