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시옷 Jun 16. 2024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일등'이기 때문은 아니듯이

대주자, 글 김준호 그림 용달

대주자

야구에서 루상에 나가 있는 주자를 대신하여 주자가 된 사람. 보통 발이 빠르고 주루 플레이에 능한 사람이 한다.


야구는 경기 규칙이 복잡하고 어렵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상하기까지 하다. 대신 뛰어주는 대주자라니.
대타, 대투수가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플레이를 대신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 있겠냐고, 그런 사람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잘 상상하지 못한다.


야구할 때 가장 행복한 44번 선수는 '대주자'다.

매 시합마다 감독님이, 팀이 불러주기를 기다리지만 관중들의 환호와 팀의 승패에 책임감을 갖는 선수다.

야구를 사랑하는 아들을 둔 나는

이 책의 장면들을 자꾸 현실로 가져와 짠하기만 한데,

아들의 생각은 다르다.

감동적이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덕아웃에 몇 명의 선수가 있는 줄 알아요? 40명이 넘어요. 그중에 시합을 못 뛰는 선수가 훨씬 많아요. 그리고 얘가 뛴 덕분에 이겼잖아요. 감독님한테 인정받았는데 뭐가 슬퍼요.


그 말에 교실에서 만난 d가 생각났다.

d는 지금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 않지만 계속 노력 중에 있는 아이다. 곱슬곱슬한 똥머리를 하고 동그란 안경을 끼고 강아지처럼 순한 얼굴로 늘 웃는다.

걸어가다 마주치면 걷기를 잠깐 멈춘 채 인사하고, 다시 걸어간다. 그 태도는 뭐랄까, 그 아이를 외모든 공부든 뭐든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데

급기야 엊그제 구술 수행평가를 하며 나를 감동시켰다.

정해준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예상 답변을 준비하고,

뽑기 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눈을 보고 말해야 하는 평가였다.

말하기 평가니까 읽지 말 것을 강조했지만

많은 아이들이 친구의 눈을 잘 보지 못했고, 외운 답변을 까먹지 않으려다 보니 AI처럼 예의바르되 건조한 말투였다.

d는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유일하게 "여러분!"하고 시작했다. 긴장감에 약간은 떨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씩씩했다. 누가 봐도 제대로 된 '말하기'였다.


주제 : 희곡 파수꾼이 나에게 남긴 질문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시오


내가 놀란 것은, 스톱워치 시간이 오버되고 있을 때 그것을 확인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점수보다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았고,
나도 점수보다 시간을 주는 게 더 맞다고 판단했다.
d가 시간을 넘기고 답변을 마쳤을 때,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d의 점수는 감점이라고 우린 다 알았다.
그때 h가 "선생님 d 잘했다고 칭찬해 주세요"했고, "d야, 객관적인 점수가 너의 멋짐을 드러내지 못해서 샘도 속상해. 그래도 그깟 숫자에 지지 말고 지금처럼 잘 커주렴"하고 나는 말했다.
d는 고맙다 대답하고, 친구들에게 이어 말했다.
(자신이 모둠의 젤 마지막 순서 말하기였다)
"얘들아 우리 다 잘했어~ 잘 끝냈다~ 우리 박수치자~"
때때로 영화 속 한 장면인가 싶을 때가 있는데
이 녀석들은 무슨 수행평가를 영화 찍듯 하네.

영화에서 돌아와,
책방 한쪽에 서서 투수자세를 잡고 팔을 휘두르는 가래떡을 본다.
44번 선수도, 교실의 d도, 내 앞에 가래떡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일등이어서가 아니듯이,
네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유도 그랬으면 한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지금처럼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방법을 찾으며
각자의 행복을 잘 찾았으면.

-(나) 발이 느려도 뛸 수 있는 만큼 스스로 뛰어야지,
대신해주는 게 어딨어?
- (가래떡) 그게 야구에요.
야구는 팀 스포츠니까요.



맞아. 우리 인생도 팀스포츠니까.
할 수 있는 만큼 스스로 하되 가끔은 대신하고, 같이 하고. 그러자.


매거진의 이전글 이보다 완벽한 '읽기'의 은유가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