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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에 겨웠다는 말

삶의 주도권을 어떻게 찾을까

by 다정한 시옷

늦은 결혼으로 어린 아기를 키우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혼자 살던 때와 비교해서 살림과 청소는 정말 큰 일이더라며, 아기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는 특히 진땀을 빼고 있단다.

몇 숟갈 먹고 말 이유식을 만드는데 맛은 그렇다 치고, 부엌이 난장판이 되었다며 사진 속의 아기와 똑 닮게 웃었다.

부럽다


그 엉망스러움 뒤의 뿌듯함이 부럽다고 내가 말했더니, 친구는 무슨 배부른 소리냐며 마치 놀림받은 사람인 양 반색했다.

나는 부엌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밀가루 하나조차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영희씨가 살림을 다 해주시니까 부엌은 나의 공간이 아니다. 영희 씨가 우리 집 근처로 이사오기 전에 태어난 첫째는 내가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지만, 둘째 셋째는 영희 씨가 솜씨를 발휘한 이유식을 먹고 자랐니 나로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어떻게든 해내는 모습이 부러운 게 맞다. 어쩌다 내가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는 각종 양념과 요리도구들을 찾느라 몇 번이나 냉장고와 찬장 서랍을 여닫는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게 다 복'이라고 했지만, 냉장고 문을 여닫는 횟수가 많을수록 나는 내 삶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느낌에 자괴감이 커지곤 한다.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살며 내 살림에 대한 주도권과 통제권이 없는 것을 정말 복이라 할 수 있을? 하루아침에 생긴 일확천금이나, 고단한 노동 없이 부를 이루고 시간에 자유로운 사람을 흔히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생에 한 번 이룰까 말까 한 일을 두고 복이라 말하면 세상 사람 대다수가 불행해다.

내가 생각하는 '복'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상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갖는 일이다. 처음엔 나도 '나는 일하니까, 살림에 대해 좀 모를 수 있지. 자괴감까지 느낄 일은 아니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알아챌 수 없는 감정은 당연히 남도 알 수 없다. 그러니 "부럽다"는 내 말을 놀림처럼 받아들이는 친구의 반응은 당연하다. 내가 느낀 감정이 자괴라면 그 감정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욕구가 좌절되어 일어난 감정인지 알아야 한다.

나의 경우, 자율성과 독립성의 욕구였다. 부엌에서 양념하나 찾는 일로 삶의 주도권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양념 찾기는 엄마와 나의 관계, 내 삶의 전반을 설명하기 위해 샬레에 올려놓고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작은 같은 일상이다.




퇴근 뒤의 워킹맘들이 바쁘게 저녁 준비를 할 때 영희 씨 덕분으로 시간을 번 나는 무엇을 하는가.

태권도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을 씻긴다.(이마저도 좀 컸다고 스스로 씻는다.) 허리디스크와 족저근막염으로 종일 불편했던 다리를 쉬기 위해 침대에 누울 수도 있 그러다 깜박 잠들 때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복에 겨웠구먼."하고 육성을 내뱉으셨나요?)

저녁이 차려진 식탁에서 영희 씨가 손수 굽고 지지고 볶은 반찬들이 아이들 입으로 잘 들어가는지 지켜며 나의 한 끼도 감사하게 해결한. 그런 다음,

보통의 엄마들이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의 물통을 소독하는 동안 나는 또 무엇을 하는가.


나는 읽고, 쓴다.


꼭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읽고 쓰는 이유는 나의 자율성이 완벽하게 발휘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희 씨가 제공해 준 시간 덕분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삶의 주도권을 찾고자 읽고 기를 선택했다.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누군가 부러워할 만한 나의 복이다.


티비를 볼 수도 있고,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할 수도 있고,
수업 자료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매일같이 읽고, 쓴다.
꼭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지낸다.
그 시간이야말로 내 자율성이 가장 온전히 발휘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읽고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결국 영희씨가 제공해 준 시간 덕분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삶의 주도권을 찾고 싶은 나는,
누군가가 만들어 준 시간 속에서 그 길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나의 복,

글쓰기가 아니라면, 나는 이 복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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