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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Jul 24. 2023

6화. 10,076명 관중 앞에 봄꽃이 피다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솔직히 나도 좀 긴장이 되더라고. 킥킥”


 러시아와의 1차전이 끝나고 주장 조소현이 말했다. 강심장인 데다 평소 쿨~하기로 소문난 그녀도 17년 만의 국내 친선경기는 떨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은 4월 5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러시아와의 친선 경기 1차전에서 1-0 승리를 거뒀다. 후반 추가시간 1분에 터진 지소연의 결승골이 역사적인 승리의 드라마를 썼다.


 오랜만에 찾아온 소중한 기회는 선수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경기 초반 잦은 패스 미스가 있었고 결정적인 골 기회를 실수로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경기로 한국 여자축구의 실력과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에 가득했다. 하지만 곧 서로를 다독이며 경기에 집중했고, 한국은 덩치 큰 러시아 선수들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패스로 한 수 위의 경기력을 선보였다. 개인 기술과 조직력에서 앞서며 역사적인 승리를 일궜다.


 “한국 여자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소연의 말이 맞다. 한국 여자축구는 국내에서 열리는 단일 친선경기를 1998년 10월 24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 이후 17년 동안 기다렸다. 지난해만 돌아보더라도 남자대표팀이 5번의 국내 친선경기를 포함해 총 12번의 친선경기를 치른 것과는 달리, 여자대표팀은 지난해 5월 파주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서 베트남과의 연습경기를 치른 것이 전부다.


 A매치 경험을 쌓기 위해 매년 출전하는 키프러스컵과 중국 4개국 친선대회는 관중이 거의 없는 경기장에서 치러야 하는 데다 한국에서 중계를 보기도 힘들다. 국가대표로서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하는 모습을 정작 국민들에게는 보여주기 힘든 현실이다. 이번 친선경기를 통해 국민들에게 한국 여자축구를 선보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선수들의 말이 가슴으로 와닿는 이유다.


 1차전을 찾은 관중은 3,177명. 선수들이 기대한 만큼의 흥행은 아니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긴 했지만 일요일 오후 2시 경기였기 때문에 보다 많은 관중 수를 기대한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지난해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평균 관중 수인 5천 명 정도는 모이지 않을까 싶었다. 지소연이 기대한 만 5천 명과의 차이는 상당했다.


 “제가 목표를 너무 크게 잡았나 봐요.” 지소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 경기장에 나갔을 때 너무 조용한 거예요. 여기가 한국인지, 키프러스인지…… 했다니까요.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고 붉은악마 응원 소리가 나니까 아, 여기가 한국이니까 싶었어요.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붉은악마 분들의 응원을 들으니까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소연은 힘을 얻었다. 경기 하루 전날 영국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그녀였지만 후반전에 교체투입 돼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고, 결국 결승골까지 만들어냈다. 17년 만의 국내 친선경기는 지소연에게도 너무나 뛰고 싶은 소중한 경기였다.


 바로 등 뒤에서 붉은악마의 응원을 받은 골키퍼 김정미도 마찬가지였다. 김정미는 A매치 88경기를 소화한 베테랑이자 대표팀의 맏언니이지만 이번 경기는 특별했다.


 “17년 만이라는 것이 더 긴장이 되더라고요.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붉은악마의 응원을 들으며 펼치는 경기는 정말 힘이 나요. 뒤에 붉은악마가 있다는 건 굉장히 든든해요.”


 김정미의 말대로 국내 친선경기는 언제 다시 있을지 알 수 없다. 8일 대전에서 열린 2차전이 더 걱정된 이유다. 평일인 수요일 오후 4시 경기. 1차전보다 많은 관중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경기 하루 전 대전의 한 호텔에서 만난 선수들은 2차전 관중 수를 함께 예상해 보며 한숨부터 쉬었다. 1차전에서 만 5천 명을 기대했던 지소연은 울상을 지었다.


 “대전월드컵경기장은 워낙 크잖아요. 4만 석이 넘는 다는데, 더 비어 보일 것 같아요. 천 명만 와도 많이 오는 걸 텐데…… 500명 정도 오지 않을까요?”


 1차전에 부상으로 결장했던 박은선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관중이 꽉 차고, 응원 소리도 커서 러시아 선수들이 확 쪼그라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1차전에서 이겼으니까 우리를 궁금해하실 분들이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박은선은 이미 많은 국내 축구팬들의 쩌렁쩌렁한 응원을 받아본 기억이 있다. 2005 동아시아연맹컵 때였다. 당시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북한을 상대로 한 여자 경기와 남자 경기가 연달아 열렸다. 여자 경기에 입장한 관중은 만 2천 명이었지만, 이후 열릴 남자 경기를 보기 위해 점점 많은 관중이 들어찼고 후반전에는 3만 명에 가까운 팬들이 응원을 보냈다.


 “꽉 찬 경기장에서 듣는 응원 소리가 정말 멋있었어. 지금도 남자 경기랑 붙여서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여자 경기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1차전 때는 K리그나 야구 경기랑 시간이 겹치기도 했고……” 박은선은 2차전 예상 관중 수로 조심스럽게 1,500명을 이야기했다.


 곁에서 본 선수들의 관중 수를 걱정하는 모습은 아쉬움의 토로나 푸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여자축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고, 선수들은 그를 통해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고 있었다.


 “우리끼리 더 똘똘 뭉치는 수밖에 없어.”


 조소현이 말했다. 여자축구를 취재하면서 늘 들어온 말이다. 우리가 잘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관심은 따라온다는 것.


 박은선이 말했다. “WK리그 여자 선수들은 항상 100명~200명 있는 경기장에서 뛰잖아요. 한 명이라도 많은 관중들 앞에서 한 번이라도 더 뛰는 게 모든 선수들의 바람이죠. 우리가 뭔가를 이뤄놓고 관중들 앞에서 팬서비스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게끔 해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월드컵에 나가서 첫 승도 하고, 더 욕심 내서 16강도 가고, 잘해서 쭉쭉 올라가면 남자축구만큼은 아니더라도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지소연이 말했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여자축구 A매치 하면 4만 석 경기장도 꽉 차요. 차더라고요.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일본은 월드컵 챔피언이잖아요. 우리도 월드컵 같은 메이저 대회에서 성적을 내야 해요. 성적도 못 내고 경기력도 안 좋으면서 관중 차길 바라는 건 웃긴 거 같아요. 계속 관중이 오게 하려면 우리가 잘해야 해요.”


 2차전의 날이 밝자 선수들은 관중 수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었다. 선수들은 라커룸에 모여 오지 않은 관중에 연연하지 말고 보러 와준 분들, 그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함께 다짐했다. 예상대로 대전월드컵경기장은 조용했다. 지소연이 걱정한 500명은 확실히 넘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많은 수도 아니었다.

그런데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에 속속 모여들었다. 뒤늦게 경기장에 입장한 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온 학생들이었다. 군복을 입고 열을 맞춰 앉은 군인들도 눈에 띄었다. 전반 21분 조소현의 선제골이 터지자 군인들의 굵은 함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후반전이 시작할 즘에는 경기장 1층의 E석과 W석이 대부분 들어찼다. 대한축구협회가 발표한 이날 관중 수는 6,899명. 1차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기대를 놓았던 선수들에게는 서프라이즈 파티, 깜짝 선물 같은 것이었다.


 힘을 얻은 선수들은 1차전보다 짜임새 있는 플레이로 보답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함께 뛴 박은선, 지소연 투톱은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며 팬들 앞에서 가치를 증명했다. 후반 6분 지소연은 박은선이 러시아 수비수들을 상대하는 혼전 중 흘러나온 공을 차 넣으며 쐐기골을 성공시켰다.


 한국 여자축구에 17년 만에 찾아온, 그리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기회. 두 번의 친선경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선수들은 이제 두 달 앞으로 다가온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향해 축구화 끈을 바짝 조여야 한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지소연이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선수들은 각자의 소속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스스로를 갈고닦아야 한다. 월드컵에서 만날 상대들은 러시아보다 훨씬 강하다. 선수들은 항상 이를 되뇌고 있다. 12년 만에 출전하는 월드컵에서 한국 여자축구의 새 역사를 써야 한다.


 “3천 명이 3만 명이 될 때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소연은 1차전을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2차전에서는 3천 명이 6천 명으로 늘었다. 다음번에는 어떨까? 지소연의 꿈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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