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제가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면……”
가정이다. 지난 5월 8일 파주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 소집된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 선수들은 하나같이 단서를 붙였다. 누구 하나 예외는 없었다.
4월 30일 발표된 국내 소집훈련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26명. 이중 23명이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 한국이 12년 만에 출전하는 월드컵. 김정미와 박은선을 뺀 24명의 선수들에게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꿈의 무대다. 꿈의 무대로 가기 위한 경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8일 오후 파주로 속속 모여든 선수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공존했다. 평소 대표팀 소집 때보다 두 배는 훌쩍 넘는 취재진에 어색해하는 모습도 있었다. 저마다 짧은 소감과 각오를 밝히는 선수들에게서 월드컵에 대한 기대가 가득 느껴졌다.
“6월 말까지 필요한 짐들을 다 챙겨 왔어요.”
여민지가 웃으며 말했다. 최종 23명 안에 들어 월드컵을 모두 마칠 때까지 대표팀에 남아있겠다는 뜻이다. 아마도 다른 모든 선수도 여민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절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진 않겠다.’ 경쟁에 대한 긴장감은 선수들이 가져온 짐보다도 훨씬 무겁다.
그런데 한 선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속팀 일정으로 합류가 늦어진 박은선과 지소연을 제외하고 24명이 모여야 했지만, 이날 입소한 선수는 23명이었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미드필더 이영주가 부상 검진 차 병원에 들렀다 오기로 했다고 전했다.
한 시간 남짓이 흐르고 대표팀의 첫 훈련이 시작되기 직전,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영주가 명단에서 제외됐다는 것이다. 정밀 진단 결과 오른쪽 무릎인대 손상으로 전치 4주의 진단이 떨어졌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부터 꾸준히 대표팀과 함께했던 이영주의 월드컵 출전이 무산됐다.
소집 하루 전에 얻은 부상이었다. 이영주는 7일 열린 IBK기업은행 2015 WK리그 부산상무와 이천대교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다. 심지어 후반전 추가시간에 당한 부상이다. 같은 부산상무 소속인 권하늘의 마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정말 안 됐어요. 종료 1분 남겨 놓고 다쳐서……”
윤덕여 감독의 얼굴에도 착잡함이 가득했다. “안타깝죠. 본인은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감독으로서 선수 보호를 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입니다.” 월드컵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 대표팀은 소집 첫날부터 이를 여실히 느꼈다.
이영주의 탈락으로 남은 탈락자는 2명이 됐다. 골키퍼 4명 중 1명, 필드플레이어 21명 중 1명은 일주일 간의 국내 훈련을 마치고 다시 짐을 싸게 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예고된 결말이 어찌 보면 잔인하게도 느껴진다. 내놓고 티를 내진 않아도 모든 선수들은 저마다의 무게로 불안감을 가지고 훈련에 임했다. 윤덕여 감독이 말했다.
“떨어지는 선수가 상처받을 수 있어요. 코칭스태프들과 저도 그 부분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경쟁을 통한 긴장감이 정신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요. 떨어지는 선수에게는 잔인할 수도 있지만 탈락의 상처가 훗날 더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거예요. 2010 남아공 남자월드컵 명단에서 탈락한 이근호 선수가 상처를 딛고 더 훌륭한 선수로 성장한 것처럼요.”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수들은 일주일간의 훈련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소집 이튿날인 9일 오후에는 체력 테스트를 실시했다. 일명 ‘공포의 삑삑이’라고 불리는 요요 테스트다. 심박수 측정 장치를 착용하고 기준 시간 내에 20미터 간격의 콘 사이를 왕복으로 달리는 것이다. 달리는 선수들의 심박수를 체크해 심폐지구력과 회복 속도 등을 평가했다. 체력 테스트에서는 막내 이소담과 이금민이 빛났다.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다운 강철 체력으로 나란히 체력 1, 2위를 차지했다.
10일에는 외출이 주어졌지만 많은 선수들이 개인 운동에 전념했다. 특히 부상에서 갓 회복한 선수들이 그랬다. 수비수 심서연과 임선주는 각각 발목 부상과 팔꿈치 부상으로 이전까지 정상 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 소속팀에서도 경기에 나서지 못해 경기 감각도 떨어져 있는 상태다. 꾸준히 대표팀에 몸 담아 온 선수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보다 탈락에 대한 부담감은 더했다.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몸을 끌어올려야 한다.
올해 초 장경인대 부상으로 3개월 넘게 쉰 전가을 역시 마찬가지다. 전가을은 4월 중순부터 조금씩 소속팀 경기를 뛰며 감각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가을은 휴식 시간에도 개인운동을 통해 몸만들기에 애썼다.
필드플레이어 중 1명의 탈락자가 누가 될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즉, 누구나 탈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조소현은 주장인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과 첫 미팅하면서 이야기했어요. 누군가는 나가게 될 것이고, 그게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연히 가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이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훈련할 때만큼은 다 잊고 서로 도우면서 최선을 다하자고 이야기했어요.”
11일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윤 감독이 진작부터 예고했던 지옥의 체력 훈련이 문을 연 것이다. 심서연과 임선주도 훈련에 합류했다. 오전에는 전술 훈련, 오후에는 체력 훈련으로 각각 1시간 40분가량의 강도 높은 훈련을 이틀 연속 실시했다.
체력 훈련은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셋씩 짝을 지어 운동장 반을 전속력으로 달리며 드리블과 크로스 슈팅을 주고받는 훈련이다. 한 선수당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각각 7세트씩 총 14세트를 수행해야 한다. 웃음기를 띠던 선수들의 표정에 회가 거듭될수록 지친 기색이 역력해져 갔다.
“더 빨리! 가을아 빨리! 유미야 빨리!” 코칭스태프들의 호령에 선수들은 이를 악물었다. 체력이 떨어져 제 속도가 나오지 않자 선수들은 “악~~~!” 소리를 지르며 남은 힘을 짜냈다. 비가 온 뒤라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선수들은 온통 땀에 젖어 녹초가 됐다.
필드플레이어들의 경쟁이 ‘보일 듯 말 듯’이라면, 눈에 보이는 경쟁은 골키퍼 자리다. 오랫동안 대표팀의 굳건한 주전 골키퍼였던 김정미와 전민경, 그리고 지난 3월 2015 키프러스컵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윤영글, 이번이 대표팀 첫 발탁인 윤사랑이 경쟁을 펼치고 있다. 냉정히 말하면 3번 골키퍼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윤영글과 윤사랑, 둘 중 한 명은 탈락하게 된다.
도전자의 입장인 윤사랑은 대표팀 발탁 소식을 듣고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훈련을 함께하며 월드컵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훈련은 어떻게 받지? 경쟁은 어떻게 해야 하지? 적응은 어떻게 하지? 걱정이 많았죠.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어요.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고 와서 그런지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훈련하는데 쉽게 떨어지면 안 되겠다는 욕심도 생겨요.”
윤사랑은 캐나다처럼 먼 곳으로 장시간 비행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최대한 억누르긴 했지만 피어나는 설렘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윤사랑은 대표팀에서의 경험을 배움의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
“언니들이랑 같이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에요. 많이 배우고 있어요. 대표팀에 와서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싶어요.”
최종 명단 발표는 15일로 예정돼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일주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함께 땀 흘린 두 명의 선수를 남겨둔 채 대표팀은 20일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난무한다고 하지만, 사실 경쟁은 어디에나 있다. 때론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월드컵 무대를 밟을 23명은 함께하지 못한 동료들을 위해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세계 최고의 무대인 월드컵으로 향하는 길은 절대 쉽게 열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