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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Jul 26. 2023

12화(마지막화). 월드컵, 끝이 아닌 시작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어떤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꿈일 수 있다.


 지난 5월 16일 파주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서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이 능곡고등학교와 연습경기를 가질 때였다. 운동장 스탠드에는 U-14 여자대표팀 선수들이 줄을 지어 앉아있었다. 국가대표 언니들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며 어느 때엔 환호를, 어느 때엔 감탄을 터트리는 소녀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경기 도중 공이 아웃 돼 이 소녀들 앞으로 굴러왔다. 한 소녀가 벌떡 일어나 공을 집어 들었다. 소녀는 드로잉을 준비하고 있던 김혜리에게 얼른 공을 던져줬다. 경기는 다시 시작됐고, 소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우와~” 그 소녀에게 다른 소녀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이 쏟아졌다.


 경기가 끝나자 소녀들은 눈을 반짝였다. “들어가서 사진 찍어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국가대표 언니들과 사진을 찍는 소녀들의 표정이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이 소녀들도 한두 번쯤, 어쩌면 더 많이, “여자가 무슨 축구냐”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지금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차가운 시선 또는 무관심 속에서 선수들이 계속해서 축구를 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축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축구를 하며 살고, 나아가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선수들의 꿈이었다.


 연습경기를 찾았던 U-14 대표팀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언니들의 경기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몇 년 후 국가대표가 된 자신을 그려봤을 거다. 소녀들에게 국가대표 언니들은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고, 어느 연예인, 유명인보다도 더 빛나는 별이다.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은 6월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에 나선다. 축구를 사랑하는 소녀들의 별이자 꿈인 그녀들이 또 다른 꿈의 무대에 서는 것이다. 한국이 12년 만에 출전하는 월드컵. 김정미와 박은선을 제외한 21명의 선수들에게는 생애 첫 월드컵이다. 월드컵 첫 승과 16강을 목표로 한 대표팀은 한국여자축구를 이끌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안고 지난 20일 미국 전지훈련을 떠났다.


 “어린아이들은 우리만 보고 있어요. 우리가 잘해야 해요.”


 선수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성인 대표팀이 좋은 경기를 하고 좋은 성적을 내야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어린 여자축구선수들에게도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관심과 반짝 관심이 오가는 한국 여자축구의 현실이 그녀들에게 지운 짐이다.


 2014년 기준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여자축구팀은 총 78팀이다. 초등 23팀, 중등 20팀, 고등 17팀, 대학 9팀, 실업 9팀이다. 등록선수는 초등 422명, 중등 494명, 고등 367명, 대학 209명, 실업 213명 등 총 1,705명이다. 2019 FIFA 여자월드컵 개최지 선정에서 한국을 밀어내고 개최권을 따낸 프랑스의 경우 등록선수는 9만 명에 달한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에는 3만 명을 훌쩍 넘는다.


 황폐한 토양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한국은 2010 FIFA U-17 여자월드컵 우승과 2010 FIFA U-20 여자월드컵 3위라는 놀랄만한 성적을 냈다. 이후 한국 여자축구는 도약의 기회를 잡았지만 지원은 빗나갔고 관심은 금세 사라졌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는 여자축구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여자축구 활성화 지원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2013년까지 총 49억 8천만 원을 지원해 초∙중∙고∙대학 여자축구 45개 팀을 창단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반짝 관심에 따른 마음만 앞선 정책일 뿐이었다. 문화부는 초∙중∙고∙대학 여자축구팀을 2010년 당시 57개에서 2013년까지 102개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현재의 초∙중∙고∙대학 여자축구팀 수는 69개(2014년 기준)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 한 학교에서 팀을 창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학생 수 자체가 줄어든 데다 학습권을 침해하지 않는 방향의 팀 운영을 바라는 학부모들의 요구와도 상충되는 등 학교체육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정책의 일부였던 WK리그 산하 유소녀 클럽팀 운영 역시 계획에서 어긋났다. 올해 들어서야 연고지 정착을 시작한 WK리그의 현실에서 산하 클럽팀 운영은 언감생심이었다.


 이렇듯 여자축구 저변 확대는 제자리걸음 중이다. 여자축구의 얇은 선수층은 향후 대표팀의 성적과도 곧장 연결된다. 여자축구에 오랫동안 열정을 쏟아온 김대길 대한풋살연맹 회장은 “현재 20세 이상 선수층은 좋아요. 이번 월드컵과 2019년 월드컵까지 뛸 수 있는 좋은 선수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밑의 층으로 갈수록 뛸 선수가 부족해요. 지금부터 장기적인 계획을 갖추고 준비하더라도 몇 년간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며 한국 여자축구의 암흑기가 올 것임을 예상했다.


 가까운 선례로 중국이 있다. 중국은 1990년대의 여자축구 강호로 1990년, 1994년, 1998년 아시안게임 연속 금메달, 1999 FIFA 여자월드컵 준우승 등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탓에 이후 10년 동안 부침을 겪었고 최근 서서히 다시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김 회장은 한국 역시 중국과 같은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며, 그 암흑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번 월드컵에서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들의 각오가 비장한 이유다. 선수들은 국내 A매치 친선전이 17년 만에 열리는 것에 대해서도, 그 경기의 관중이 기대보다 적게 온 것에 대해서도, 월드컵에 나서는 길에 이코노미 항공편을 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여자대표팀은 이번 월드컵에서 브라질, 코스타리카, 스페인과 조별리그를 치른다.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브라질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팀인 코스타리카와 스페인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평가다. 하지만 대표팀은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윤덕여 감독은 브라질전에 맞춰 선수들의 체력을 100%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질의 빠르고 기술 좋은 공격수들을 막기 위해 잘 쓰지 않던 스리백을 훈련하기도 했다.


 “공은 둥글잖아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작년 인천 아시안게임 때 우리가 북한과 그렇게 대등한 경기를 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권하늘과 전가을이 입을 모았다. 북한과의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은 지켜본 이들에게나 직접 뛴 선수들에게나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한국은 세계적 여자축구 강호인 북한을 만나 늘 고전했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선수들은 하나 된 마음으로 몸을 불살랐고, 비록 1-2 역전패를 당했지만 그 투혼에 큰 박수를 받았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의 각오다. FIFA 랭킹 7위의 강팀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결과와 관계없이 북한전과 같은 감동적인 경기를 한다면 그 분위기를 이어받아 이어진 2, 3차전, 나아가 토너먼트에서까지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선수들의 예상이자 다짐이다.


 전력은 더욱 강해졌다. 아시안게임에서 8강전과 준결승전 두 경기만을 뛰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소속팀으로 돌아가야 했던 지소연이 일찌감치 합류해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당시 소속팀 일정으로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던 박은선도 전지훈련을 함께 하고 있다. 유럽 무대를 경험한 두 선수의 합류로 공격의 다양성은 커졌다. 박은선은 양 발목 상태가 모두 좋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다. 2003년에 이어 두 번째 월드컵 출전을 앞둔 박은선은 존재만으로도 경기장 안팎에서 대표팀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우리가 잘해야 해요. 우리가 보여 줘야 해요.”


 여자대표팀을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다. 관심과 지원을 요구하기 전에 대표팀이 먼저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 일본에서 일본 여자축구의 발전을 목격하며 부러움에 마음이 아팠다는 지소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A매치 친선전을 시켜달라는 말을 하고팠다는 심서연, 월드컵 출정식에서 “대한민국에서 여자축구선수로 살기가 좀 외로웠거든요”라고 말하며 울던 전가을… 모두가 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월드컵 출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캐나다에서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한다. “월드컵에서 일 한 번 내고 싶어요. 기적을 만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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